소련 수용소의 프루스트 강의

양선희 2021. 1. 30.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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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유제프 차프스키 지음
류재화 옮김
밤의책

문학이 인간의 삶을 지지하고, 특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의 버팀목이 되는 현장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가슴 벅찬 감동을 준다. 이는 또한 왜 나는 문학이라는 이 고단한 삶을 포기할 수 없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라는 부제를 단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바로 그러한 문학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참전 장교였던 유제프 차프스키가 소련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으면서 동료 포로들에게 했던 프루스트 강의 모음집이다.

그가 갇혔던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의 수용인원은 4000명이었지만, 이송과 대학살 등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79명이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죽거나 사라지는 가운데 영하 45도의 맹추위를 견디며 노동을 하고, 노동의 일과가 끝나면 포로들은 식당으로 쓰던 차가운 방에서 다닥다닥 붙어앉아 그들은 함께 수감된 지식인들의 강의를 들었다.

차프스키는 자신을 매료시켰던 프루스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 강의한다. 강의록은 길지 않다. 그 안에는 프루스트 작품에 등장하는 ‘마들렌의 향기’와 같은 상징들과 프루스트의 작품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창작 과정과 생애를 알게 해주는 열쇠, 프루스트의 삶과 질병과 죽음 등 작가와 작품에 오롯이 몰입하는 온전한 문학 강의로 이루어져 있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포로수용소 생활에 대한 한탄, 비애, 우회적인 고충 토로와 같은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 강의록이 어떤 상황에서 쓰여졌는지 아는 독자의 눈엔 오히려 이 부분이 놀랍다. 이 책은 맨 앞의 서문과 강의노트 사진을 제외하곤, 여느 프루스트 강연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히 프루스트를 이해하고 싶은 순수한 문학적 동기를 가진 독자라도 가볍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양선희 대기자 su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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