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혁명' 에스토니아인, 고조선 후예 아발족 피 흐른다
성벽·적석총 무덤도 고조선 양식
아발족, 학살 피해 북쪽으로 피란
'발족' 정착 의미로 '발트해' 명명
빗살무늬토기·아시아인 유골 발견
고대 한국어와 유사한 어휘도 많아
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 〈5〉
소련 등 지배 받다가 1991년에 독립
프랑코왕국 샤를마뉴 대왕이 아발제국의 개종을 거부한 이교도(단군 신앙)들을 학살할 때 이야기다, 796~799년 갑자기 사라진 아발족 가운데는 학살을 피해 추운 북방으로 피란한 사람들이 있었다. 필자는 이때 북방으로 민족 이동한 아발족 기병대와 그 가족이 에스토니아 민족의 직계 조상이라고 본다. 다음 몇 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투아니아어에서는 ‘발트’를 지금도 ‘발도’(Valdo)라고 하는데, 역시 ‘발(檀)+터(地)’의 뜻이다. 아발족의 땅(Land of Avars)을 가리키는 것이다. 에스토니아 남부에 타르투(Tartu)라는 큰 주가 있다. ‘Tar’(檀)는 ‘Var’(檀)의 별명이므로, ‘타르투’는 ‘타르+투’로서, 역시 아발족의 땅이란 뜻이다. 에스토니아 도시 고유지명들인 ‘발가’(Valga), ‘바라’(Vara), ‘바이가’(Vaiga), ‘발마’(Valma) 등에 들어있는 ‘발’도 모두 ‘아발’을 가리킨다.
셋째, 에스토니아어는 핀란드어와 함께 우랄어족 핀·우구루어파의 발트핀어군에 속한다. ‘우구르=아발’임은 전회에서 밝혔다. ‘핀·우구루어’는 ‘핀·아발어’와 같은 의미다. 에스토니아족이 아발족이라는 증거가 된다. 에스토니아어는 ‘주어+목적어+동사’의 어순이다. 교착어이고, 후치사이며, 아직도 모음조화가 남아있다. 한국어처럼 복모음이 발전되어 있고, 자음에서 f, z 발음은 없으며, 어휘에 복수형 어미 변화와 남녀 성별이 없다.
어휘에는 특히 고유지명에 고대 한국어와 유사한 말들이 많이 남아있다. 예컨대, 큰 마을(또는 읍락) 이름은 지금도 ‘OO마’(마을의 뜻)로 되어 있고, 언덕 취락지는 ‘OO메’로 되어 있다.
다섯째, 고대 또는 중세 에스토니아인의 무덤은 원형 또는 직사각형 적석총이었다. 원형 적석총은 고조선 문명 무덤 양식의 하나이다. 평양 당모루 2호 유적, 최근 발굴된 한국 강원도 춘천 중도 고조선 유적에서도 볼 수 있다.
일곱째, 문화와 풍속으로는 음악과 노래를 매우 좋아했다. 중세 에스토니아인들은 ‘로루’(laulu)라는 합창을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일할 때나 축제 때나 ‘앞소리’가 먼저 독창을 하면 온 공동체가 따라 합창했다. 독창과 합창이 번갈아 나오는 양식이 마치 고대 한국의 ‘두레’ 합창과 같은 양식이다. 에스토니아 선각자들이 채집한 민요가 1917년에 1만4500여 수, 1940년에는 2만3800여 수 간행됐다. 1869년 타르투에서 최초의 ‘에스토니아 노래 축제’(The Estonian Song Festival)를 개최한 이래 5년마다 전국적 노래 축제가 열린다.
아발족 다른 한 갈래는 핀란드 정착
교황 이노센트 2세가 1199년 지금의 에스토니아 지역 이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십자군’ 파병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208년 독일 기사단이 에스토니아를 침략해 오태패(Otepää)를 점령했고, 덴마크 기사단이 사라마(Saarema) 섬을 점령했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약 20년간 항쟁했으나 1227년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여 북부는 덴마크, 남부는 독일 리보니아(Livonia) 기사단에 점령당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당하고, 농노 상태에 떨어졌으나, 계속 토속 신앙과 고유의 언어와 민속을 유지하며 긴 식민지 백성의 생활을 보냈다. 덴마크, 독일, 폴란드, 러시아, 소련 등의 지배를 잇달아 받았다. 1920년 2월 2일 독립했다가 1940년에 다시 소련의 속령이 되었다. ‘숲속 형제들’(독립운동단체 이름)의 무장투쟁과 ‘노래하는 혁명’의 문화 독립투쟁 끝에 에스토니아는 마침내 1991년 8월 20일 독립국을 수립하여 지금까지 발전을 이어가고 있다.
■ ‘노래하는 혁명’(singing revolution)
「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자 에스토니아 주민들은 198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아 이 조약 폐기와 완전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들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3국 수도를 연결하는 긴 도로에 600㎞에 달하는 ‘인간 띠’를 형성했다. 모두 200만여 명이 국가를 합창하는 모습을 보며 전 세계가 폭발적으로 환호하며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소련이 물러날 때까지 독립 쟁취의 노래를 계속했는데 이를 ‘노래하는 혁명’이라고 부른다. 1991년 8월 소련에서 정변이 일어난 기회를 포착하여 1991년 8월 20일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도 결국 이 독립을 추후 승인했다. 700여 년의 학대와 학살과 수모에 굴하지 않고 쟁취한 독립이었다.
」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 교수(1965~2003) 정년퇴임. 한양대·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2003~2018) 역임.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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