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시간 수만 번 망치질, 은은한 한국의 '달' 떴다
11kg 은판 돌려가며 두드려 완성
실수 한 번 용납 안 되는 판금 기법
밑바닥 굽 없애고 주둥이 좁히고
'한국의 미' 담은 은 달항아리 제작
이 작가가 구사한 방법은 판금 기법이다. 왼손으로 크고 무거운 은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정확하게 접점을 때려 판을 종잇장처럼 얇게 편 뒤 조금씩 오므려 형태를 만들어나간다. 현대 금속공예의 대가인 일본 무사시노 예술대학의 히로시 스즈키 교수는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끝없이 이어가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는 작업”이라며 “2008년 이상협 작가가 영국에서 처음 은 달항아리를 발표했을 때 금속 공예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내가 아는 한 현재도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할 것”이라고 평했다.
작가는 영국 캠버웰 컬리지 오브 아트(현 런던예술대학) 재학 중 영국의 귀금속감정사협회인 골드스미스 컴퍼니가 주최한 ‘영 디자이너 어워드’를 수상했다. 당시 수상작은 지금 런던 빅토리아앤알버트 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졸업 후 런던에 공방을 차린 이 작가는 17년간 유럽의 수많은 아트 페어와 유명 갤러리에 작품을 선보이며 ‘검은 눈동자’의 ‘실버스미스(SilverSmith·은 공예가)’로 이름을 알렸다.
“주얼리를 직접 만들기도 하고 배달도 다녔죠. 월급은 20만원이었는데 주머니에는 늘 500만원 어치 귀금속을 넣고 다녔어요. 하하.”
당시 근무했던 ‘우노실버웨어’의 이종길 실장을 스승으로 모시며 다양한 금속 기술을 배운 이 작가는 제대 후 런던 유학을 떠났다. 반지·목걸이 같은 작은 주얼리 세공보다 테이블 한가운데 올려놓고 감상할 수 있는 조각품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실버스미스의 나라’를 선택했다.
그런데 런던으로 건너가자마자 IMF 금융위기가 발생해 환율이 엄청나게 올랐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은 서둘러 귀국했지만, 이 작가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텼다. “술·담배만 안 하면 먹고 살만큼은 벌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새벽 청소·배달·접시 닦이·공연 현장보조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던 이 작가는 천재 조각가 앤소니 곰리의 작업에도 여러 번 보조 작업자로 참여했다. “곰리를 만난 후 전공을 후회했을 만큼 조각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게 조각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야 비로소 무엇을 만드는가 보다 어떤 생각을 담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게 됐죠.”
삼국의 도자를 많이 전시해놓은 런던의 박물관들이 그의 교과서이자 놀이터가 됐다. 한국 고유의 선을 찾은 다음에는 자신만의 비율과 미학을 덧입혔다. 항아리 밑바닥의 굽을 없애고, 주둥이는 좁히고, 목은 조금 길게 하되, 구(球)의 어깨 볼륨은 살포시 낮췄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건 ‘흘러내림’ ‘녹아내림’ ‘얼어붙음’ ‘휩쓸림’ 등으로 표현되는 표면의 질감이다. 차갑고 매끈한 금속인 은에 인간의 질풍노도와 자연의 사계를 담았다고나 할까.
이번 전시에선 달항아리 외에 은으로 만든 호리병, 매병, 다관, 술잔 등 90여 점을 볼 수 있다. 2월 14일까지, 무료.
서정민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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