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시간 수만 번 망치질, 은은한 한국의 '달' 떴다

서정민 2021. 1. 30.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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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협 은 작품전 '플로우'
11kg 은판 돌려가며 두드려 완성
실수 한 번 용납 안 되는 판금 기법
밑바닥 굽 없애고 주둥이 좁히고
'한국의 미' 담은 은 달항아리 제작
이상협 작가가 만든 은 달항아리는 1억원이 훌쩍 넘는다. [사진 이상협]
지난 18일 서울 신라호텔 지하 1층에 위치한 갤러리 ‘휴’에 특별한 ‘달’이 떴다. 금속공예가인 이상협(49) 작가가 은으로 만든 달항아리다. 무게 11㎏, 두께 5.5㎜ 한 장짜리 은판을 망치로만 두들겨 직경 55㎝, 높이 53㎝, 두께 1㎜의 거대한 달항아리로 탄생시켰다.

이 작가가 구사한 방법은 판금 기법이다. 왼손으로 크고 무거운 은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정확하게 접점을 때려 판을 종잇장처럼 얇게 편 뒤 조금씩 오므려 형태를 만들어나간다. 현대 금속공예의 대가인 일본 무사시노 예술대학의 히로시 스즈키 교수는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끝없이 이어가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는 작업”이라며 “2008년 이상협 작가가 영국에서 처음 은 달항아리를 발표했을 때 금속 공예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내가 아는 한 현재도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할 것”이라고 평했다.

작가는 영국 캠버웰 컬리지 오브 아트(현 런던예술대학) 재학 중 영국의 귀금속감정사협회인 골드스미스 컴퍼니가 주최한 ‘영 디자이너 어워드’를 수상했다. 당시 수상작은 지금 런던 빅토리아앤알버트 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졸업 후 런던에 공방을 차린 이 작가는 17년간 유럽의 수많은 아트 페어와 유명 갤러리에 작품을 선보이며 ‘검은 눈동자’의 ‘실버스미스(SilverSmith·은 공예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상협 작가. 신인섭 기자
국내 한 공업고등학교에서 귀금속 가공을 전공한 이 작가는 졸업 후 명동의 작은 금은 세공방에 취업했다. 1990년대만 해도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 지하상가에는 금은방이 빼곡했다. 이곳에서 기술자들이 직접 주얼리를 만들어 여러 금은방에 납품하던 시절이다.

“주얼리를 직접 만들기도 하고 배달도 다녔죠. 월급은 20만원이었는데 주머니에는 늘 500만원 어치 귀금속을 넣고 다녔어요. 하하.”

당시 근무했던 ‘우노실버웨어’의 이종길 실장을 스승으로 모시며 다양한 금속 기술을 배운 이 작가는 제대 후 런던 유학을 떠났다. 반지·목걸이 같은 작은 주얼리 세공보다 테이블 한가운데 올려놓고 감상할 수 있는 조각품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실버스미스의 나라’를 선택했다.

그런데 런던으로 건너가자마자 IMF 금융위기가 발생해 환율이 엄청나게 올랐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은 서둘러 귀국했지만, 이 작가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텼다. “술·담배만 안 하면 먹고 살만큼은 벌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새벽 청소·배달·접시 닦이·공연 현장보조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던 이 작가는 천재 조각가 앤소니 곰리의 작업에도 여러 번 보조 작업자로 참여했다. “곰리를 만난 후 전공을 후회했을 만큼 조각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게 조각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야 비로소 무엇을 만드는가 보다 어떤 생각을 담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게 됐죠.”

이상협 작가가 만든 은 주전자는 크기가 19x24.5x27㎝ 다. [사진 이상협]
2008년 처음 발표한 은 달항아리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고민한 결과다. “항아리의 포만한 선에 중독됐죠. 항아리라는 기(器)는 한·중·일에 다 있지만, 그 선과 비율이 다 달라요. 동양 미학에 관심 많은 서양 컬렉터들은 내 작업을 보고 대번에 ‘네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삼국의 도자를 많이 전시해놓은 런던의 박물관들이 그의 교과서이자 놀이터가 됐다. 한국 고유의 선을 찾은 다음에는 자신만의 비율과 미학을 덧입혔다. 항아리 밑바닥의 굽을 없애고, 주둥이는 좁히고, 목은 조금 길게 하되, 구(球)의 어깨 볼륨은 살포시 낮췄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건 ‘흘러내림’ ‘녹아내림’ ‘얼어붙음’ ‘휩쓸림’ 등으로 표현되는 표면의 질감이다. 차갑고 매끈한 금속인 은에 인간의 질풍노도와 자연의 사계를 담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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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특별한 촉감들은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만들어지지 않는다. 땅땅땅 똥땅똥땅. 5㎜ 두께의 은판이 1㎜가 되려면 수만 번 이상을 두드려야 한다. 때려서 넓게 펴는 이 단순한 과정을 통해 2D인 은판이 3D인 항아리가 된다. 면으로 구를 만드는 이 정교한 작업을 위해 어떤 날은 밥도 거르고 10시간 이상 망치질에만 몰두한다. 밥을 먹으면 자신도 모르게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이란다. 은판을 쥔 왼손은 망치가 은을 내리칠 때마다 생기는 수만 번의 진동을 온전히 감당한다. 그래서 이 작가의 양손과 양 팔뚝은 굵기도 크기도 다르다. 그가 보낸 시간들이 그 속에 뭉쳐져 있다.

이번 전시에선 달항아리 외에 은으로 만든 호리병, 매병, 다관, 술잔 등 90여 점을 볼 수 있다. 2월 14일까지, 무료.

서정민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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