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시인 백석의 '잃어버린 34년'
1963년부터 죽을 때까지 절필
신념에 어긋나는 시를 쓰는 대신
침묵 선택.. 더 큰 '시적 울림' 줘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이렇게 첫 연만 소개해도 알아볼 사람이 많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이 시의 전문은 모르더라도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저 유명한 구절은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백석은 1962년 수령에 대한 ‘찬양시’를 마지막으로 북한 문학사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일찍이 백석의 시에 빠져 그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낸 바 있는 송준 선생이 본격적인 평전을 준비하던 차 중국 조선족 취재원으로부터 백석이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우리는 그가 1963년 숙청당해 사망했다고 알고 있기까지 했다. 2012년 백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세상에 나온 ‘시인 백석’(흰당나귀) 3권은 그가 1996년 2월 15일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는 마지막 작품을 발표한 1962년부터 1996년 세상을 하직하기까지 근 34년 동안 단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백석은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2020년 여름, 소설가 김연수는 그간 연재했던 단편들을 한 권의 장편으로 묶어냈다. ‘일곱 해의 마지막’(문학동네)이 그것이다. “그토록 강요받던 찬양시를 마침내 쓰는 마음과, 그 뒤 삼십여 년에 걸친 기나긴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옛말과 흑백 사진과 이적표현의 미로를 헤매고 다녔다”는 ‘작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김연수의 지난 몇 년이 백석의 ‘잃어버린 34년’을 보충하기 위한 시간이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1958년의 마지막 날, 그다음 날부터 삼수군 관평리 관평협동조합으로 ‘현지파견’되어 노동자로 살아가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백석에게 그의 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를 암송하며 그를 최고의 시인으로 경외하는 삼수읍 인민학교 여교원 진서희를 만나게 한다. 이 허구의 장면이 자신의 시를 송두리째 부정당한 백석을 위로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시를 쓰는 대신 시를 끊음으로써 시를 ‘행하고자 했던’ 그의 행위가 시적 울림을 갖는 것은 이 후배 작가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 같기는 하다. 이렇게 백석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만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의 34년은 잃어버린 것이 아닐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세상일이 다 그러할 것이다.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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