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년... 영국 킹스맨 양복거리서 추리닝 판다
원격로봇 도입해 해외손님 맞고 마스크·파자마 등 팔며 위기버텨
“세계대전도 겪었는데… 이겨낼것”
“당신 뒤로 이동해 등판 치수를 잴 거예요. 가만히 서 계시면 됩니다.”
27일 오전 10시(현지 시각) 영국 런던의 고급 맞춤 양복 거리 ‘새빌 로(Savile row)’. 172년 된 양복점 ‘헌츠맨'의 수석 재단사 다리오 카네라(47)씨가 고객 치수를 재느라 여념이 없었다. 30년 경력의 그가 손에 든 건 줄자가 아닌 노트북. 그는 노트북을 이용해 8800㎞ 떨어진 서울의 한 매장에 있는 바퀴 달린 카메라 로봇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고객 사진을 촬영했다. 그는 “100년 된 가위로 옷을 만들던 내가 이런 기술을 활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웃었다. 헌츠맨은 서울·베이징·홍콩 등 전 세계 6곳의 매장과 파트너십을 맺고 이런 카메라 로봇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맞춤 양복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새빌 로가 코로나 시대를 맞아 생존을 위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카네라씨의 양복점처럼 첨단 로봇을 도입하는가 하면 일부 양복점은 수제 마스크를 제작해 내놓고 있다. 전통 신사 양복의 자존심을 던지고 헐렁한 바지, 트레이닝 재킷, 파자마까지 내놓은 곳도 등장했다.
‘코로나 분투기'가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새빌 로는 200년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남자 양복의 자존심 같은 곳이다. 1800년대 초부터 재단사들이 몰려들며 형성됐는데 아직도 직접 손으로 양복을 제작하는 걸로 유명하다. 디너 파티나 결혼식 때 입는 ‘턱시도(디너 슈트)’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1860년 양복점 헨리풀이 에드워드 7세의 비공식 만찬용으로 만든 것인데, 이 양복점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넬슨 제독, 나폴레옹 3세, 윈스턴 처칠 같은 역사적 인물뿐 아니라 찰리 채플린, 비틀스 같은 스타들도 이곳을 즐겨 찾았다. 영국 왕실은 오랜 단골이다. 카네라씨는 100년 넘은 고객 장부를 들춰 보이며 “빅토리아 여왕, 에드워드 8세 등이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맞춤 양복은 완성까지 석 달가량 걸리고, 한 벌당 최소 5000파운드(약 750만원)에 달한다.
이런 전통도 코로나 앞에선 흔들렸다. 약 200m의 골목에 들어선 가게 20여 곳 중 3분의 1가량이 최근 폐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항상 전 세계에서 오는 고객들로 북적였는데 코로나로 여행이 막히자 매출도 줄었다. 일간 텔레그래프는 “양복점 매출의 70% 이상이 해외에서 발생했다. 코로나가 재단사들 생존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했다.
재택근무 증가로 정장 인기가 줄어든 탓도 있었다. 이곳 유일한 한국인 테일러 김동현(32)씨는 “봄 시즌을 앞두고 정장을 맞추려는 손님들로 북적여야 할 때인데 코로나 때문에 타격이 크다”며 “영업직은 대부분 해고당했고 나이 많은 재단사들도 휴직에 들어갔다”고 했다.
양복점들은 갖가지 자구책을 내놓고 있다. 로봇을 활용하거나 ‘만들 수 있는 건 다 만든다’는 전략으로 살길을 찾고 있다. 대부분의 양복점에서 리넨, 캐시미어 같은 고급 소재로 된 마스크를 제작해 팔고 있다.
제품 구성도 다양화했다. 115년 역사의 ‘앤더슨 앤드 셰퍼드’는 기존의 몸에 딱 맞는 정장 바지 대신 헐렁한 옷을 내놨다. 재단사 새뮤얼 라본(26)씨는 “코로나로 각 잡힌 옷보다는 좀 더 편하고 가벼운 옷으로 이동하는 트렌드 변화에 맞춘 것”이라고 했다. 집에서 가볍게 입을 수 있는 리넨 소재의 파자마도 내놨다. 라본씨는 “홈웨어 매출이 전년보다 40% 가까이 성장했다”고 했다. 또 다른 양복점 리처드제임스는 트레이닝복을 내놨다. 토비 램 디자인 디렉터는 “재택근무에 이상적인 옷”이라고 했다.
고급 맞춤 양복의 시대가 저무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재단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카네라씨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맞춤 양복을 멋있다고 생각해 관심을 많이 보인다”며 “전통은 죽지 않는다”고 했다. 새뮤얼씨도 “고객들이 맘속에 생각한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만드는 옷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했다. 양복점 ‘캐드 앤드 더 댄디'의 오너 제임스 슬리터씨는 “새빌 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대공황도 버텨냈다. 우리는 여기에 계속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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