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칼럼] 90년대생 수습 사무관들의 '기재부 손절'

세종=박성우 기자 2021. 1. 2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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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기획재정부) 손절(관계를 끊다), 야근 많고 빡세다고 하더라”

지난 12일 기획재정부 세종청사 1층. 검정색 정장을 차려입은 5급 수습 사무관들이 이날 열린 기재부의 면접을 마치고 모여있었다. 한 수습 사무관이 옆에 있던 동기에게 "여기 어때"라고 묻자, 동기는 한숨을 내쉬며 "나랑 안맞는 것 같다. 내일 면접보는 국세청에 올인해야 겠다"고 답했다. 우리나라 경제 사령탑인 기재부의 현실을 보여주는 90년대생 신임 공무원들의 냉혹한 평가였다.

정부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국가 예산을 편성하는 기재부는 나랏일의 ‘알파와 오메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정부 주요 사무에서 기재부가 빠지고서는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기재부 차관을 거쳐 다른 부처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상식처럼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한 기재부 고위 관료는 "노무현 정부 때는 국무회의에 우리부 출신이 대여섯분이 앉아 계셨고, 다른 정부에서도 기재부 차관 출신들은 다른 부처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상식처럼 여겨졌다"고 말했다.

2008년 출범한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재무부(MOF)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인 모피아(Mofia)는 관치주의에 물든 경제관료들이 마피아 처럼 폐쇄적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만든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모피아는 경제관료들의 힘이 그만큼 강력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과거 개발시대 경제발전을 이끌었던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출신 경제관료들은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당시 군사정권의 군부실세에게도 굴하지 않았다. 군대 예산을 늘려달라는 군 장성들이 권총을 뽑아 위협해도 경제관료들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대통령이 경제관료들의 손을 들어줬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도입,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에 앞장선 것은 모두 대한민국 경제관료들이었다.

지난 2019년 적자국채를 줄이려는 기재부의 방침을 되돌리기 위해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폭로를 한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은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선배들이 정치권이 밀어붙이는 얼토당토 않은 일을 막았단 얘기를 무용담처럼 많이 했다. 그런 자부심이 아직 약간은 남아있는 곳이 기재부였다." 그는 인터뷰 내내 기재부를 ‘우리부’라고 지칭하며 옛조직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재무부·경제기획원’이 ‘재정경제원’으로, 또 ‘재정경제부·기획예산처’로, 지금의 기획재정부로 간판을 바꾼 과정에도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을 빨아들인 것은 이런 자부심과 나라 경제를 지킨다는 사명감이 매력적으로 비춰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올해 첫 부처 배치를 받는 행시 65회 수습 사무관들의 선택은 달랐다. 수습 사무관들에게 희망 부처 1순위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기재부는 정원을 채우지 못한 ‘미달 부처’가 됐다. 경제관료를 지망하는 재경직에서는 산업통상자원부와 함께 미달 부처에 이름을 올렸고, 일반행정직에서도 전북 군산에 위치한 새만금개발청과 동급이 됐다. 최상위 5등 이내 중 기재부 지원자는 일반행정직은 아무도 없었고, 재경직에서만 1명 있었다. ‘기재부 복도를 걸어다니면 발에 채이는게 행시 수석, 차석’이라는 말은 ‘화양연화(花樣年華·화려하고 아름답던 옛 시절이라는 뜻)’가 됐다.

사태가 이렇게 된데는 지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재부 선배 관료들의 책임이 크다. 무엇보다도 경제수장인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지난 2년동안 재임기 중 보여준 모습을 반성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청와대와 당의 ‘하명(下命)식 정책’이 쏟아지는 가운데, 홍 부총리가 번번이 소신을 접는 일이 반복됐고, 지난해 11월에는 공개적으로 사표를 냈다가 번복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관가에서는 홍 부총리의 이런 모습 때문에 수습 사무관들이 기재부를 손절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홍 부총리의 현재를 ‘나의 미래’로 수습 사무관들이 오버랩한다는 것이다.

결국 지난 몇년간 기재부가 기재부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게 기피 부처로 전락한 이유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현직 기재부 직원들 사이에서조차 "사명감을 잃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위기감으로 인식해야한다.

4월 서울·부산시장 재보선을 앞두고 ‘나랏 돈 풀라’는 집권여당의 기재부 압박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여당 대표가 ‘곳간지기 구박한다고 뭐하나’고 할 정도다. 지금처럼 정치권 압력에 고분고분하는 동네북 신세에 머무른다면 기재부에는 미래가 없다. "국민께서 요청하시는 나라 곳간지기 역할은 기재부의 권리, 권한이 아니라 국민께서 요청하시는 준엄한 의무, 소명"이라는 자신의 말이 부끄럽지 않도록 홍 부총리는 행동해야 한다.

[박성우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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