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 2월의 독립운동가에 권쾌복·배학보·유흥수 선정

김정욱 기자 mykj@sedaily.com 2021. 1. 2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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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와 광복회·독립기념관은 '2월의 독립운동가'에 권쾌복(1921~2009)·배학보(1920~1992)·유흥수(1921~2016) 선생을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1941년 2월 유흥수 선생은 권쾌복·배학보 선생을 만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통합된 비밀결사 조직인 다혁당(茶革黨)을 만들었다.

다혁당의 당수는 권쾌복 선생이, 부당수는 배학보 선생이 맡고 유흥수 선생은 문예부 산하 문예창작부 책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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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독립 위한 '다혁당' 결성..학생들에 독립·민족의식 고취
왼쪽부터 권쾌복·배학보·유흥수 선생. /사진제공=보훈처
[서울경제]

국가보훈처와 광복회·독립기념관은 ‘2월의 독립운동가’에 권쾌복(1921~2009)·배학보(1920~1992)·유흥수(1921~2016) 선생을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이들은 대구사범학교 내의 비밀결사인 ‘다혁당(茶革黨)’ 사건의 주요 인물들이다. 다혁당은 항일운동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조직으로 결성된지 5개월 만에 일제에 실체가 발각돼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와해됐다.

권쾌복·배학보·유흥수 선생은 1937년 4월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9기생으로 입학했다. 민족차별 교육이 자행되던 당시인 1939년 학교에서 학생 노동력 강제동원과 조선·일본학생의 마찰로 빚어진 ‘왜관사건’으로 조선인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세명은 왜관사건 이후 조선 역사와 문학 관련 서적·잡지 등을 읽고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모임인 ‘백의단’을 결성했고, 이후 다혁당으로 발전했다.

유흥수 선생은 1940년 11월 23일 조국 독립을 목표로 하는 비밀결사인 ‘문예부(文藝部)’를 결성했고, ‘학생(學生)’ 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했다. 또 독립에 대비해 학문 분야 연구를 통해 실력을 양성하는 또 하나의 비밀결사인 ‘연구회(硏究會)’도 조직했다.

1941년 2월 유흥수 선생은 권쾌복·배학보 선생을 만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통합된 비밀결사 조직인 다혁당(茶革黨)을 만들었다.

다혁당은 조직 체계에서 당수와 부당수를 두고 총무·문예·예술·운동부 등 4개 부서를 운영했다. 특히 문예부 산하에 문예창작부와 연구부를 두었는데 이는 이전의 ‘문예부’와 ‘연구회’를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다혁당의 당수는 권쾌복 선생이, 부당수는 배학보 선생이 맡고 유흥수 선생은 문예부 산하 문예창작부 책임을 맡았다.

이렇게 통합돼 활발한 활동을 준비하던 다혁당은 오래 가지 못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활동하던 정현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내용이 발각돼 1941년 7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수사과정에서 다혁당 활동이 드러나 결국 결성된지 5개월 만에 다혁당이 와해된 것이다.

이후 대규모 검거 열풍이 불어 1941년 12월에 35명이 재판을 받았으며, 이 시기 비밀결사 사건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보훈처는 “다혁당 사건은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항일운동이 침체 된 시기에 벌어진 운동”이라며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운동이자 민족운동으로 높이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정부에서는 이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권쾌복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배학보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유흥수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김정욱 기자 myk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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