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눈꽃 르포] 이토록 많은 눈은 본 적이 없다

글 손수원 기자 사진 한준호 차장 2021. 1. 29.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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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어리목~윗세오름 왕복 9.4km 설산 산행
눈이 내려도 너무 많이 내렸다. 한라산漢拏山(1,950m) 설경을 취재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국립공원 CCTV를 확인했는데 매일 밤 눈이 내렸다.
제주에 온 첫 날은 한라산 입산 전면 통제, 둘째 날은 부분 통제가 되었다. 백록담까지 올라가려고 관음사 코스와 성판악 코스를 노리고 있었건만 셋째 날에도 겨우 탐라계곡과 속밭까지밖에 열리지 않았다. 결국 백록담을 포기하고 그나마 윗세오름(1,700m)까지 열린 어리목 코스를 택했다.
눈과 바람이 만든 눈꽃 절경
날씨는 기가 막혔다. 아침부터 깨끗하고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마음이 급하다. 전날까지 한라산을 오르지 못한 등산객이 어리목으로 몰릴 것이 뻔했다. 영실 입구까지 제설작업이 되지 않아 선택지가 어리목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리목 입구 삼거리에 주차를 하고 탐방센터까지 걸어간다. 역시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하지만 서두르는 이는 없다. 어차피 윗세오름까지만 다녀올 것이라 시간이 넉넉한 덕분이다.
“천천히 가자고요. 어차피 길이 하나라 앞에서 못 가면 우리도 못 가니까요”
오랜만에 함께 산행에 나선 ‘Korkim’ 김규대 대장이 여유를 부린다. 김 대장은 과거 대마도 시라다케~아리아케 종주, 서해안 섬 산행 등 월간<山> 취재에 자주 함께했던 산꾼이다.
“윗세오름까지만 가도 좋은 구경 많이 할 수 있을 거예요. 오히려 백록담을 옆에서 보기에는 이곳이 더 좋죠. 게다가 눈이 이렇게 많이 내렸으니 사제비동산(1.423m)에 올라서면 설경이 기가 막힐 거예요.”
‘산바다여행사’ 김영환 대표가 백록담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 준다. 그래, ‘꿩 대신 닭’이 될지 ‘꿩보다 닭’이 될지는 가보면 알 것이다.
어리목 목교를 지나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오늘 기온이 최저 영상 5℃, 최고 영상 15℃이다. 하지만 해발 970m의 고지대인 이곳은 아직 눈이 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앞서 간 등산객들이 눈을 잘 밟아 놓아 러셀하고 가는 수고는 없다.
눈 쌓인 동산은 온통 놀이터
등산로 왼쪽으로 한라산국립공원 직원들이 전기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간다. 삽이 실려 있는 걸 보니 필시 제설작업 하러 가는 모양새다. 아니나 다를까, 모노레일은 곧 멈추었다. 레일이 눈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직원들이 내려 삽질을 시작했다. 이 많은 눈을 언제 다 치울까 걱정이다. 등산로만 눈이 잘 다져져 있지, 그 옆으로는 50~60cm가량 눈이 쌓여 있다. 군대에서 제설 작업 해본 이는 알겠지만, 눈 치우는 것만큼 영혼이 탈탈 털리도록 힘든 작업도 없다. 등산객의 안전을 위해 애쓰는 국립공원 직원들께 감사드린다.
조금 더 고도를 높이자 눈꽃 세상이 펼쳐진다. 조릿대는 눈에 파묻혀 키 큰 나무들만이 눈 세상을 구경하고 있다. 눈과 바람이 만든 눈꽃이 절경이다. 어느 나무든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지를 축 늘어뜨렸다. 어느 곳에선 긴 터널을, 또 어느 곳에선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있다. 그 환상적인 풍경에 모든 등산객의 발길이 느려진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이 곧 포토존이다.
“정말 눈이 많아요!”
헉헉대며 눈꽃터널을 빠져나오니 앞서 가던 김 대장이 소리친다. 사제비동산이다. 온통 하얀 세상이다. 이곳이 네팔 히말라야인지, 스위스 알프스인지, 일본 북알프스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냥 온통 하얀 ‘눈 동산’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동산에 올라 눈싸움 삼매경이다. 어떤 할아버지는 눈밭에 누워 ‘섹시한’ 포즈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우리도 나이와 체면은 잠시 잊고 눈밭에 벌러덩 누워 보기로 한다.
“어이쿠! 빨려 들어간닷!”
아무 생각 없이 눈밭에 몸을 뉘었는데 땅으로 푹 꺼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눈이 많이 쌓였었나, 아니면 그동안 내 몸의 체지방이 많이 쌓인 건가. 어쩐지 똑같은 눈길을 걸어도 나만 함정에 빠진 것처럼 다리가 푹푹 빠지더라니.
사제비동산부터 윗세오름까지 가는 길은 놀이터나 다름없다. 평소 같으면 조릿대가 가득해 발길도 들이지 못했을 곳을 지금은 눈으로 가득 차 마음대로 드나든다. 물론 발 한 번 잘 못 디디면 허리까지 빠질 수도 있지만.
봄이면 울긋불긋 철쭉이 만발할 테지만 지금은 곱게 핀 설화가 한창이다. 하얀 눈을 소복이 덮어쓴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나무들이 온통 크리스마스트리다. 이번 겨울은 코로나 때문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못 느끼고 흐지부지 지나갔었는데 한라산에 와서 비로소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기분이다.
만세동산(1,606m)에 이르러 소나무가 바람을 막아 눈이 쌓이지 않은 공간에 자리를 잡고 간식타임을 가진다. 마치 설동을 파고 들어온 기분이다. 바람을 맞지 않으니 햇살이 따뜻하다. 맞은편 ‘설동’에선 어떤 건장한 청년이 외투를 벗고 반팔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외국에서나 볼법한 자유스러운 풍경들이다.
눈과 바람을 데리고 윗세오름에 도착한다. 드넓은 오름 마당엔 형형색색 등산복을 입은 등산객이 각자의 자리에서 컵라면을 먹느라 분주하다. 봉지라면은 뺏어 먹는 라면이 가장 맛있고, 컵라면은 한라산에서 먹는 라면이 가장 맛있다더니 과연 그 명성이 대단하다. 잠시 마스크를 벗는 것만도 행복한데, 그 입으로 뜨거운 라면이 들어가니 이보다 더 행복할 것이 무엇이랴.
백록담 풍경 ‘내 마음에 저장’
드넓은 눈밭 위에서 하루가 저물어가지만 등산객들은 아직도 놀거리가 남았다는 듯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한다. 우리 또한 갈 수 없는 백록담을 한껏 눈과 마음에 담느라 하산이 늦어진다. 지난달 덕유산 상고대도 그랬었지만 자연이 하는 일에 미련 둬 봤자 부질없는 일이다. 그리고 백록담 대신 내어준 또 다른 ‘겨울왕국’에서 실컷 놀았으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그저 신기함에 하루 눈밭을 즐기고 가는 외지인의 바람으로는 이 아름다운 풍광이 조금이라도 더 길었으면 하지만 이 눈도 곧 녹고 그 자리를 진달래와 철쭉이 대신할 것이다. 그때는 또 그때의 즐거움을 만끽하면 된다. 이 순백의 겨울 동산에서 신나게 놀았던 것처럼 말이다.
산행길잡이
어리목 목교 지나 초반 2.4km 정도가 다소 급경사지만 사제비동산까지만 오르면 어려운 구간은 다 지난 셈이다. 윗세오름까지는 부드러운 평원 길이지만 눈이 쌓이면 시간이 좀더 소요된다.
조릿대가 많은 구간이라 등산객이 미리 밟아 놓은 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쌓인 눈에 다리가 푹푹 빠진다. 스패츠와 아이젠이 필수다. 사제비동산부터는 사방이 트여 바람이 세니 바람막이 재킷을 꼭 챙기도록.
햇빛이 강한 날에는 선글라스와 선크림도 필수다. 윗세오름대피소에 화장실이 있다. 이곳에서 남벽분기점까지는 2.1km, 1시간 정도 걸린다. 윗세오름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거나 영실 코스로 하산할 수 있다.
남벽분기점에서는 돈내코 코스로 하산할 수 있다. 기상상황에 따라 수시로 코스가 통제되므로 전날 저녁에 한라산국립공원 홈페이지를 확인해야 한다.
교통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40번 버스(첫차 07:30, 막차 15:20, 약 1시간 간격 운행)를 타고 어리목입구 삼거리에서 내린다. 약 35분 소요. 승용차는 1100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최근 제주도 가는 항공권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 항공권 비교사이트를 통하면 김포→제주 구간 편도 최저 9,900원, 평균 3만~4만 원대로 구할 수 있다. 피크 시간대나 주말을 낀 날도 1주일 정도만 미리 예매하면 5만~6만 원 정도에 구할 수 있다.
숙식(지역번호 064)
제주공항 근처 ‘펄리플러스 호텔(702-0071)’은 누워서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다 조망도 있으며 숙박 예약 사이트 등에서 5만 원 전후로 예약할 수 있다. 제주시내 ‘늘봄흑돼지(744-9001)’는 흑돼지삼겹살(1만8,000원) 외에 한우탕(9,000원), 굴해장국(8,000원) 등 식사를 할 수 있다.
성읍민속마을 굼부리식당(787-4861)은 흑돼지불고기가 유명하다. 제주산 고사리나물을 함께 올려 볶아 먹는다. 모듬 세트를 시키면 불고기, 옥돔구이, 모물쑥전, 좁쌀막걸리가 함께 나온다. 3인 기준 4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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