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악!' 대신 '억!' 소리 났다, 겨울 치악산

한겨레 2021. 1. 2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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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국립공원 중 당일 산행이 가능한 곳이다.

유난히 허하고 시리던 어느 겨울날, 원주 치악산을 오르며 세상만사 걱정거리 홀홀 흘려보냈던 한 편의 추억 속으로 '랜선 산행'을 떠난다.

이름에 '악'자가 들어간 산은 산 중에서도 험한 것으로 악명 높다.

그중 치악산은 '치가 떨리고 악에 받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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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김강은의 산 네게 반했어]

눈꽃이 절경인 겨울 치악산.

높이: 1288m

코스: 구룡사-대곡안전센터-세렴안전지킴터-세렴폭포-사다리병창길-비로봉-원점회귀

거리/소요시간: 11.4㎞/5시간

난이도: ★★★★

기타: 국립공원 중 당일 산행이 가능한 곳이다. 가을 단풍 산행지로도 유명하지만, 겨울에도 아름답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누구에게도 쉽게 터놓지 못할 고민 하나쯤 품고 살아간다는 것일까. 예측 불허한 시국, 먹고사니즘과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갈등, 인간관계…. 쉽게 답을 정할 수 없는 사사로운 고민을 품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나 고민 없는 삶을 꾸리기보다 더 중한 것은 그것을 해소할 나만의 방법을 잘 찾는 것. 그럴 때마다 산은 나만의 대나무 숲이자 고민 상담소가 되어 주었다. 유난히 허하고 시리던 어느 겨울날, 원주 치악산을 오르며 세상만사 걱정거리 홀홀 흘려보냈던 한 편의 추억 속으로 ‘랜선 산행’을 떠난다.

이름에 ‘악’자가 들어간 산은 산 중에서도 험한 것으로 악명 높다. 그중 치악산은 ‘치가 떨리고 악에 받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국립공원으로 선정된 이유가 있을 터. 높은 고봉들이 연이어진 산세가 수려하고 그 사이로 흘러내린 깊은 계곡과 폭포들로 볼거리가 풍부한 덕이다. 덕유산, 소백산과 함께 눈꽃 산행지로 이름난 산이기도 하다. 덜컹거리는 무궁화호를 타고 원주역에 내리자 반기는 건 추적추적 내리는 진눈깨비와 희뿌연 하늘이었다. 대개 여행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새하얀 겨울 정경을 기대했던 마음에 실망감이 몰려왔다.

치악산. 사진 김강은 제공

구룡사에서 시작하는 코스는 본격적인 등산 전 들머리가 길다. 구룡골 계곡 따라 황장목이 촘촘히 들어선 산책로는 세렴폭포까지 평탄하게 이어져 있다. 계곡 소리가 충만한 이 길만 걸어도 충분한 힐링이 되겠다. 우윳빛으로 꽁꽁 얼어붙은 세렴폭포를 지나자 표지판이 나타난다. 악명 높은 사다리병창길과 조금 덜 힘들다는 계곡 길의 갈림길이다. 이왕 악산에 들어온 이상 거대한 암벽이 사다리꼴 모양 같다 하여 이름 지어진 ‘사다리병창길’을 경험해 보기로 했다. 끝없이 이어진 덱(데크) 계단과 돌길의 경사도가 가파르다 못해 무심하게 느껴진다. 가팔라지는 경사만큼 숨도 가빠졌다. 아래로는 지나온 구룡골이, 위로는 비로봉이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말등바위 전망대에서 한숨을 돌렸다. 크고 높은 산일수록 페이스 조절이 중요하다.

더 높이 오르니 길을 에워싼 나뭇가지가 점차 반짝였다. 얇지만 견고한 반짝임. 눈꽃이나 상고대보다 귀하다는 ‘빙화(氷花)’다. 상고대가 녹아서 흘러내리다가 세찬 바람에 다시 꽁꽁 얼어붙은 것이다. 영롱하게 빛나는 빙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신비한 현상 때문인지 가냘픈 눈 가시들이 돋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는 빙화들이 물결처럼 움직여 서로 부대끼며 ‘다다닥 다다닥’ 신비로운 마찰음을 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하모니였다. 시각과 청각을 지배당한 채 영원의 시간 속을 걷는 듯했다.

치악산. 사진 김강은 제공

숨을 몰아쉬며 올라선 최정상 비로봉에서 바라본 세상은 압도적이었다. 수분 가득 머금은 대기의 필터는 산세를 더욱 푸르게 그려냈고 첩첩이 쌓인 견고한 산봉우리들은 존재감을 과시했다. 봉우리를 잇는 마루금 따라 핀 빙화의 물결이 마치 새하얀 파도처럼 보였다. 정상에 다다른 사람마다 입 밖으로 꽉 찬 감탄사를 내뱉었다. ‘악!’ 보다는 ‘억!’ 하는 소리로.

놀라운 풍경은 늘 말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상치 못한 비경이 가져다주는 감동은 열심히 걸어낸 자의 몫이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오래도록 그곳에 서서 마루금을 눈에도 담고 그림으로도 담았다. 종이 위에 슬며시 얹은 붓질이 그대로 얼어버렸다. 나뭇가지에 꽃 피운 빙화처럼 나의 화폭 위에도 빙화가 맺혔다. 경이로움 앞에서 사사로운 고민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어떠한 조언이나 위로보다 더 크고 묵묵한 자연의 어루만짐이었다.

글·사진 김강은(벽화가·하이킹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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