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공동묘지에서 자는 청년, 그를 만나다!

한겨레 2021. 1. 2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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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노동효의 지구 둘레길]풍경에서 다른 세계 발견하는 우리
아오낭 해변에서 만난 이고르와 나도
UFO 찾아 세계 여행하는 그의 목적지는 샹그릴라
내 숙소로 데려와 그와 보낸 열흘, 잊지 못해
러시아 출신의 방랑자 이고르를 만났던 아오낭 마을의 거리. 사진 노동효 제공

개의 눈으로 본 지구는 ‘흑백’과 ‘노랑’ ‘파랑’만으로 이뤄진 세계다. 개는 노란 바탕에 그려진 빨간 장미를 보지 못한다. 빨간 장미도 노랗게 보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다른 세계를 본다. 각자의 눈을 통해 인식되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개와 인간이 ‘사물의 형태’만 공유할 뿐 세계를 다른 색깔로 인식하듯 유목민과 정착민도 ‘풍경의 형태’만 공유할 뿐 다른 세계를 본다.

일찍이 혜초, 마르코 폴로, 체게바라와 같은 방랑자와 모험가들이 있었다. 정착민이 보기에 이들의 여행은 무모해 보였다. “불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까지 오가겠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방인에게 잠자리를 구하면서? 미쳤군.” 그럼에도 혜초와 같은 여행자가 있었기에 우리는 말한다. “오래전이니까 그랬을 수도.” 그러나 ‘과거’이기에 가능했던 걸까? 혜초가 살던 시대에도 일상에 안주해서 모험과 무관한 생을 살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실은 방랑자와 일상인의 ‘세계’가 달랐을 뿐이다.

방랑자 이고르를 만난 건 타이 끄라비주의 아오낭 비치에서였다.

무렵 나는 추위를 피해 동남아에서 겨울을 보낼 작정이었다. 어디로 갈까? 인터넷 검색 중 아오낭 비치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해안선 따라 석회암 절벽이 우뚝 서 있고, 그 아래로 모래사장이 길게 뻗어 있었다. 수영복 입은 사람들. 축복처럼 쏟아지는 햇살. “그래 바로 여기야!” 배낭을 꾸려 방콕으로 간 후 끄라비행 버스에 올랐다.

안다만해에서 맞이한 첫 아침을 기억한다. 새벽 6시 끄라비 정류장에 도착, 택시를 잡았다. “아오낭 비치로 가주세요.” 기사는 해변에 나를 내려놓았다. 동이 트면서 차츰 해안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탄성이 저절로 터졌다. 이토록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한 철 보낼 생각을 하니 얼마나 설레던지.

가까운 섬이나 해변을 오갈 때 주로 이용하는 롱테일 보트. 사진 노동효 제공

오토바이를 빌려 마을을 돌아다녔다. ‘렌트’ 표시가 붙은 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구멍가게를 다니며 월세방을 수소문했다. 한 가게 여주인이 전화를 걸었다. “너희 가게 주인이 월세 놓는다고 하지 않았니?” 전파상에서 일한다는 사촌이 왔다. 그는 사장이 세놓은 집을 보여주었다. 해변에서 걸어서 15분, 원룸들로 구성된 주택가였다. “이 집 2층입니다. 보세요.” 외관도 내부도 깔끔했다. “얼마죠?” “보증금 200달러에 월 200달러, 전기료와 수도료는 별도예요.” 허름한 게스트하우스 1인실도 1박에 1만원이 넘는데 침대, 에어컨, 냉장고, 소파, 테이블까지 갖춰진 풀옵션 원룸이 하루 7000원 수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끄라비주 일대는 타이 최고의 해변 휴양지 중 하나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더 비치> 촬영지로 유명한 피피섬, <007 황금 총을 가진 사나이> 촬영지이자 <스타워즈>에서 카스크 행성으로 나오는 카오핑칸섬이 지척이었다. 미디어에 노출되었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석회암 절벽이 띠를 두른 해변 곳곳이 절경이었고, 산호초 사이로 열대어가 노니는 바다는 스쿠버다이빙과 스노클링의 천국이었다.

석회암 절벽이 띠를 두르고 있는 타이 끄라비주의 아오낭 비치 해안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야자수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풍경 아래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낮 시간을 보내고, 햇살이 누그러지면 바다로 나가 수영을 하고, 안다만해로 저무는 일몰을 지켜본 후 집으로 돌아오는 게 그 무렵의 일상이었다. 그날도 일몰 감상 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금발의 유럽계 청년이 말을 걸었다. “담배 있으면 한 개비 줄래?” 늘 보던 관광객과 달리 무척 초라한 행색이었다. 내가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니?” “러시아에서.” “온 지 얼마나 되었는데?” “사흘 전.” “숙소는 어디야?” “숙소는 없어. 처음엔 해변에서 잤는데 폭죽 소리 때문에 공동묘지로 잠자리를 옮겼어. 인적도 드물고 조용해서 잠자기 좋아.” 황당한 대답이었다. 담배를 건네고 지나치려다 걸음을 되돌렸다. “같이 밥 먹을래? 내가 살게.” 식당으로 갔다. 그의 사연이 궁금했다.

영화 촬영지로 유명해진 피피섬. 노동효 제공

이고르는 공학을 전공한 청년이었다. 친형과 러시아 횡단 여행 중 알타이 지역에서 미확인비행물체를 목격했다. 유에프오(UFO). 허공에 떠 있는 궐련형 비행체였다. 그날의 충격이 그를 뒤흔들어 놓았다. 머릿속이 폭발했고 영성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부처, 노자, 장자, 인도 출신 성자의 책까지. 인도로 가기로 했다. 함께 유에프오를 목격했던 형이 각국 비자 발급비로 300달러를 쥐여주었다. 중국, 베트남을 지나 타이에 이르렀고 미얀마, 방글라데시를 거쳐 인도로 갈 거라고 했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니?” “러시아에선 히치하이킹, 중국부턴 걸었어. 100㎞를 걷는 동안 사람을 전혀 만나지 못한 적도 있었지.” “자고 먹는 건 어떻게 해결해?” “과일을 따 먹기도 하고 물만 마시기도 했어. 도시에선 경찰서를 찾아가 재워달라고 했지.” “인도엔 왜 가는데?” “샹그릴라에 가는 거야. 히말라야에 있는 상상도시라고 하지만 실재해. 유에프오처럼.”

대여한 오토바이를 타고 아오낭 비치 인근을 돌아보다 마주친 길 위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그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침대가 하나뿐이라 바닥에서 자야 할 테지만 공동묘지 보단 편할 거야. 며칠이든 머물러.” 이고르는 환호하며 공동묘지에 뒀다는 짐을 가지러 갔다가 한시간 후 돌아왔다. 긴 여정이 무색하게 20ℓ들이 배낭이 전부였다. 그는 아침이면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한 후 하루를 시작했고, 내가 사 놓은 과일 한두 개를 먹고 외출했다가 저문 후에야 들어왔다.

“오늘은 뭘 하며 시간을 보냈니?” “바닷가에 있었어. 참 오늘은 특이한 갈매기를 봤어. 무리에서 떨어져 비행연습을 하는 듯한 녀석이 있었거든. 조너선 리빙스턴처럼 말이야. <갈매기의 꿈> 읽어봤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야.”

<갈매기의 꿈>은 청소년권장도서로 널리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전이 그렇듯 출간 시엔 성인을 위한 책이었고, 들여다보면 성경·불경·도덕경에 관한 지식이 총합될 때 진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이고르는 “조너선은 예수, 스승인 설리번은 부처, 부족장 챙은 노자의 말을 전한다”고 여겼다.

필자가 묵었던 숙소. 사진 노동효 제공

저녁이면 맥주를 마시며(술은 나만 마셨다. 이고르는 채식주의자에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담배를 달라고 했던 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라고 했다. 내 집에서 기거하게 되면서 그 말은 신이 시킨 거라고 여겼다.) 그가 여정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었다. 믿기지 않는 우연과 인물로 가득했지만, 나는 믿었다. 이십대 중반 유럽에서 한국까지 오던 길에서 나 역시 그런 우연과 인물을 만났기에. 하루는 오후 수영을 하러 나갔다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던 이고르를 만났다. 곁에 앉자 이고르가 이런 얘길 들려주었다.

“오늘 해변에서 재밌는 걸 봤어. 많은 사람이 수영은 잠깐 하고, 바다가 아닌 스마트폰을 봐. 에스엔에스(SNS)에 글이나 사진을 올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면서. 그들의 몸은 해변에 있지만, 액정화면에 초점을 맞춘 채 가상세계에서 시간을 보내. ‘매트릭스’는 이미 존재해. 텍스트와 이미지로 된 2차원 형태긴 하지만.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에스엔에스라는 ‘매트릭스’에서 지내. 영화와 다른 건 인공지능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거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중 어디서 보내느냐는 건, 저마다 선택이지만 난 현실세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바다를 보면 쉬기 좋았던 아오낭 비치 인근의 외딴 숲. 사진 노동효 제공

열흘이 지나 이고르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다시 길을 떠날 거라고 했다. 이고르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너 정말 샹그릴라가 있다고 생각하니?” “이미 난 샹그릴라에 있어. 조나단에게 부족장 챙이 말하지. 어디든 가려거든, 이미 도착했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넌 참 이상한 녀석이야.” “너도 이상해. 생면부지의 나를 재워주고 집 열쇠까지 복사해 줄 정도로. 나쁜 사람이라면 네 노트북, 카메라 같은 귀중품을 훔쳐 사라질 텐데.” “조너선 리빙스턴을 좋아하는 사람이 도둑일 리는 없거든.” “하하하.”

섬과 섬 사이의 뱃길. 사진 노동효 제공

이고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졌을 때 갑자기 울컥했다. 사람들이 떠올랐다. 100달러를 여비로 유럽에서 한국까지 오던 길, 느닷없이 밥을 사주던 헝가리의 부랑자, 야간 운전을 하는 동안 제 침대를 사용하라던 체코의 택시기사, 이방인을 위해 아내와 아기까지 깨워 안방에서 재워주던 파키스탄의 교사, 중국어를 모르는 나를 위해 신장에서 산둥반도까지 동행해준 위그루족 철학자. 보답할 길 없지만, 길 위에서 받은 은혜를 갚는 법은 또 다른 여행자를 환대하고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이고르가 샹그릴라를 찾아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훗날 집으로 돌아간 이고르는 알게 되리라. 실은 샹그릴라나 천축국이 목적지가 아니라 길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이 목적지였다는 걸.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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