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로 수집한 농촌사 박물관

최재봉 2021. 1. 29. 05: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종광 연작소설집 '성공한 사람'
장삼이사 주민들의 개성과 신화 부각

성공한 사람
김종광 지음/교유서가·1만4500원

김종광의 소설집 <성공한 사람>에는 단편 열한 작품이 실렸는데, 모두가 안녕시 육경면 역경리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편마다 주인공은 다르지만, 같은 인물들이 여러 작품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연작소설집에 해당한다. 김종광은 ‘작가의 말’에서 선배 작가 이문구의 연작소설집 <우리 동네>를 언급하는데, <우리 동네>가 1970~80년대 농촌의 사회상을 포착했다면 <성공한 사람>은 2010년대 농촌 풍속도라 할 수 있다.

김종광은 이문구와 같은 충남 보령 출신이고, 고향 선배와 비슷하게 농촌을 자주 소설 무대로 삼았다. 첫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2000)에서부터 <놀러 가자고요>(2018)까지 다섯 작품집에 농촌을 다룬 소설이 서너 편씩은 들어 있었지만, 농촌을 무대로 한 작품만으로 책을 묶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농촌이라고는 해도, 주인공들이 논농사나 밭농사를 짓는 모습이 그려지지는 않는다. 역경리 주민 상당수가 70, 80대 노인인 탓이 클 것이다. 김종광은 ‘작가의 말’에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농촌 소설’이 아니라 ‘시골 소설’이라 부르는데, 농촌이라 해도 실제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많지 않고 텔레비전과 교통편의 발달·보급으로 도농복합체 같은 면모를 보인다는 뜻에서다.

일종의 마을지처럼 역경리 주민들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비중이 높은 인물이 없지는 않다. ‘김사또’와 ‘오지랖’ 부부가 그들인데, 이 부부는 ‘보일러’와 ‘당산뜸 이웃사촌’, ‘살아야 하는 까닭’ 등 세 편에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 작품들에 흩어진 정보를 취합해 보면, 팔순을 바라보는 김사또는 6년째 역경리 노인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여섯 살 아래인 아내 오지랖과는 몇 년 전부터 각방을 쓰고 있다. ‘살아야 하는 까닭’에서 노인 일자리 창출 사업의 일환으로 노인회관을 청소하는 가욋일이 생기고, 오지랖이 그 일을 맡게 된다. 한 달에 열흘, 하루 세 시간씩 청소를 하고 월 27만원을 받는 박한 처우. “뒤럽고 뒷골 쑤시고 뒤지겄단” ‘3뒤’라며 다들 피하는데다 오지랖이 평소에도 무보수로 회관 청소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잖아도 꼼꼼하고 경우가 바른 오지랖은 정식으로 청소 일을 맡고 나서는 “하도 청소를 심하게 해서 청소마마라는 새 별명을 얻”기에 이른다.

고향인 충남 보령을 모델로 삼은 안녕시 육경면 역경리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연작소설집 <성공한 사람>의 작가 김종광. “부족하지만 이문구 선생님의 <우리 동네>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로 생각하고 쓴 작품이라서 개인적으로는 책을 내고 가장 뿌듯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박현주 제공

청소마마 오지랖이 경로당 프로그램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글쓰기 강의를 듣게 되었을 때, 강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특히 어머니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면서, 아드님이 쓸 이야기를 많이많이 만들어주셔야 해요!” 오지랖의 아들인 소설가 ‘(소)판돈’은 김종광의 다른 작품들에도 자주 등장했던 작가 자신을 가리킨다.

‘보일러’에서 김사또는 젊은 여성 판촉 사원들의 꾐에 넘어가 비싼 보일러를 덜컥 구입한다. 그러나 보일러를 새로 설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굉음이 나는가 하면 연기가 솟구치고 급기야는 작동을 멈추기에 이른다. 큰 기업 이름을 믿고 기계를 들여놓았던 김사또는 고장 신고와 수리 요구를 하고자 이곳저곳에 연락을 취해 보지만 “파는 회사, 설치 회사, 고치는 회사”가 서로 책임과 관할을 떠넘기는 통에 ‘카프카적’ 악무한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코피가 멎지 않아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아무런 처치도 못 받고 이비인후과로 가 보라는 말만 듣고는 거금 5만원을 청구받은 이기분 할머니가 맛본 억울함이 김사또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코피 흘리며’)

‘가금을 처분하라고?’는 조류독감을 막고자 기르던 닭을 모두 처분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면사무소 주무관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살처분’을 요구하고, 주민들은 그 요구에 맞서 뻗대 보다가 결국 제가 기르던 닭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기에 이른다. 40여 마리나 되는 닭을 한 마리씩 잡아서 목을 비트느라 진이 빠진 노재수는 낫을 들고 닭장에 들어가 “미친듯이 휘둘렀다.” 피가 폭죽처럼 터지고 닭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가 했더니 “아직 죽지 않은 닭들이 공격해왔다. 너희도 미쳤구나.”

이렇듯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 없지 않지만, 백전노장인 주민들은 연륜에서 우러난 여유와 지혜로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간다. 이장 선거를 다룬 작품 ‘여성 이장 탄생기’에서 전임 이장이 해 놓은 일이 없다는 지적에 반어적으로 동조하는 이의 의뭉스러운 해학을 보라. “한 게 왜 없어? 엄청 놀러 다녔잖아. 글케 지성으로 관광에 참석하는 이장들은 첨 봤어. 대동여지도를 만들라고 그랬나.”

장삼이사 아니면 우수마발로 뭉뚱그려질 법한 주민들이지만, 작가는 그들 나름의 성취와 개성을 일종의 신화적 아우라로 감싼다. 특유의 성실과 뚝심으로 논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는 모습이 큰 바위 얼굴과 같다고 해서 ‘큰면’ 또는 ‘큰면장’으로 불리는 인물, 일을 벌였다 하면 어김없이 망하는 ‘또실패’, 놀라운 총기의 소유자 ‘기억댁’,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부르는 ‘역경리 이선희’ 등이 몇몇 사례다.

우표와 복권에서부터 옛 교과서와 농기구, 술병, 명함, 가전제품 등 온갖 물건을 수집해 집안을 박물관처럼 꾸며 놓은 노인 ‘반수집’은 젊은 귀촌인 차돌의 아내 학생댁에게 제가 수집한 것들을 영상으로 찍어 줄 것을 부탁한다.(‘학생댁 유씨씨’) ‘범골 농촌사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이 영상이 말하자면 김종광 소설의 영상 버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종광의 농촌 소설 또는 시골 소설은 스러지고 잊힌 공간과 사람들을 활자로 수집해 놓은 농촌사 박물관이라 하겠다. 26일 전화로 만난 그는 “안녕시 육경면 ‘면민실록’을 비롯해 농촌 현대사를 담아내는 실록 같은 소설을 계속 쓸 생각”이라며 “다음 작품으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재작년 여름 이후 어머니가 혼자 살아오신 얘기를 담은 소설을 올해 안에 낼 생각”이라고 밝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연작 소설집 <성공한 사람>을 낸 작가 김종광. 박현주 제공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