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내겐 너무 소중한 진실들

한겨레 2021. 1. 2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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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즘'(ism)이 하나의 취향이 된 시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책임이랄까, 파장이랄까, 이런 건 개인에게 귀속되어 버리는 것 같다.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른 것처럼, 다른 성격과 취향, 가치관 또한 당연하다는 말인데, 세상이 마치 무한한 다양성의 바다인 것처럼 결론 내리는 이러한 태도야말로 역으로, 아무것도 잘못된 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변화할 필요가 없다는 편협한 이즘의 단호한 표현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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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정미경의 회복하는 책 읽기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웅진지식하우스(2020)
일러스트 장선환

어떤 ‘이즘’(ism)이 하나의 취향이 된 시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책임이랄까, 파장이랄까, 이런 건 개인에게 귀속되어 버리는 것 같다. 세상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이의 비판에 대해, 사람들은 잘못되었다는 그 포인트가 아니라,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문제라 치부해버린다. 물론 ‘문제’라는 표현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이렇게 말하긴 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당신처럼 느끼지 않는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것이 잘못이라고 느끼는 건 당신의 자유지만, 그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또한 자유이다. 사람은 모두 다르니까.”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른 것처럼, 다른 성격과 취향, 가치관 또한 당연하다는 말인데, 세상이 마치 무한한 다양성의 바다인 것처럼 결론 내리는 이러한 태도야말로 역으로, 아무것도 잘못된 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변화할 필요가 없다는 편협한 이즘의 단호한 표현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편협한 이즘이란 강자의 관점을 보편이라 주장하는 차별주의이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보편에 대한 의심 없는 전제가 어떻게 세상의 절반인 여자들을 지우고 존재를 무화시키는지를 숨 가쁘게 보여준다. 마블영화에 등장하는 히어로의 성비나 공중화장실 남녀 칸막이의 개수, 여자에게는 너무 큰 방탄조끼와 너무 무거운 무기, 전립선 질환에 비해 너무도 더딘 월경전후증후군 치료제 개발 등 딱 보아도 성별과 연관되어 보이는 차별적 현실은 오히려 차분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 나를 흥분시킨 것은 언뜻 보아서는 성별과 무관해 보이는 것에 숨어 있는 ‘내겐 너무 소중한 진실들’이었다. 폭설을 치우는 작업의 순서를 바꾸었을 때의 변화,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대중교통의 노선이 의미하는 바, 주 40시간 노동이라는 지표가 숨기고 있는 무임금노동, 가족 세무신고가 벌려놓는 성별 임금 격차, 쓰나미가 덮쳤을 때 여자 사망률이 남자의 4배인 이유…. 폭풍처럼 독자를 몰아치는 데이터와 숫자, 사례와 이야기 들은 이래도 보편이 보편이냐고, 이래도 이 세계의 디폴트가 성중립적이라 주장할 수 있냐고 따져 묻는다.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보편에 대한 무의식적 신뢰가 젠더 데이터의 공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저자에 동의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해진다. 사무실 에어컨의 낮은 온도 때문에 벌벌 떨며 카디건을 걸쳐 입는 ‘나의 문제’라고 결론 내리지 않기. ‘적절한 온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적절함’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개입하기. 보이지 않게 된 내 존재를 보이게 하는 진실들을 만들어내기. 왜냐하면 나는 나 아닌 누군가를 표준으로 삼아 억지로 늘리거나 구겨 넣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니까. 누군가의 적절함을 위해 나의 불편을 참아야 하는 그런 존재가 나는 아니니까. 이건 취향도 성향도 뭣도 아니다. 생존이고 인권이다.

정미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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