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기억과 가능성..더 많은 말이 필요하다

한겨레 2021. 1. 2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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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피디와 펜 기자가 2년간 모은 여성 88명의 몸 이야기
행동 주체인 여성 신체의 공적 기록은 가장 페미니즘적인 긍정

말하는 몸 1·2
박선영·유지영 지음/문학동네·각 권 1만6000원

“편하게 말해도 될까? 빚을 10년이나 갚았는데 8천만원 빚에, 아이 셋에, 방법이 없어서 늘 마이너스였던 것 같아. (중략) 빚을 10년 이상 갚고 나니까 몸에 이상 반응이 생겼어. 긴장이 풀리니까 어떤 몸뚱이가 됐냐면, 혈압이 치솟고 맥박은 잴 수가 없고 찬바람이 불면 피가 굳는 것처럼 몸에 마비가 오기 시작해. 내 몸을 내 정신이 이끌었을 뿐이지 온전하지 않았어. 병원에서는 얼마 못 산다고 그러더라고.”(미싱사 김명선)

우리는 몸으로 태어난다. 몸이 기능을 다하면 죽는다. 의지도 희망도 몸을 통해 세계와 나를 연결해 일을 도모할 수 있다. <말하는 몸> 1, 2권은 여성의 몸을 통해 읽는 여성 88명의 삶을 담았다. 록산 게이가 자신의 몸에 대해 쓴 <헝거>를 읽고 <시비에스>(CBS·기독교방송) 라디오 피디 박선영과 오마이뉴스 사회부 기자 유지영이 <말하는 몸>이라는 팟캐스트를 2년여간 꾸린 것이 책의 바탕이 되었다. <말하는 몸>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하는 내용인데, 진행자와 출연자가 대화하는 형식이 아니라 인터뷰어 유지영이 녹음실 안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면 박선영이 녹음실 밖에서 대답을 추려 독백 형식의 오디오 콘텐츠로 만들었다. 그렇게 2년여간 100명이 넘는 여성들을 만났다.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이것이었다. “몸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말하는 몸>은 장마다 화자를 소개한 뒤, 그의 말을 옮겨적은 글을 실었다.

<말하는 몸> 최초의 인터뷰이는 인권운동가 이용수였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 이용수가 구순 잔치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의 이야기다. “이렇게 역사의 산증인이 있는데도 잘못이 없다고 해요. 내가 없으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당하겠나 생각하면 잠이 안 와요. 나는 겪고, 보고, 듣고, 당하고. 그래도 오래 사니까 다행입니다. 반드시 이백 살, 삼백 살까지 살아야지.” 열네 살 때 일본군에 끌려간 경험에 대해 활자로 정갈하게 정리된 글을 읽는 것만도 고통이다. 내 몸이 아니라 딴 몸이라고 생각하니까 산다는 말. 열네 살 이후의 길고 길었던 몸의 시간이 입말을 살려 정리되어 있다.

장애여성공감 전 대표였던 배복주씨의 몸 이야기는 장애 여성의 연애에 대해서다. “비장애 남성들이 자기에게 착하고 순종하는 장애 여성을 연애 상대로 많이 채택해요.” 자신이 구성한 가정이 정상적으로 보이려면 결혼도 비장애 남성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어머니가 ‘병신의 몸’ 운운하는 말을 듣고는 관계를 끝냈다. 그 후로 자신보다 중증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언젠가는 그가 하는 연애 이야기를 더, 섹스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더 듣고 싶은 기록.

박보나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박성호의 누나다. 참사의 희생자든 유가족이든 매체에 사진이 공개되는 순간부터 외모 평가가 시작된다. 남자에게도 ‘잘 생겼다’는 댓글이 달리지만 여자에게는 더한 댓글이 달린다. “예쁜데 죽어서 더 안타깝다”는 말일 때도 있었고, 음란한 비방글도 있었다. 기사 댓글에는 외모를 평가하고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말도 있었다. “왜 여성은 고통받는 순간에도,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그렇게 평가를 당하는 존재여야 하는가.”

<말하는 몸> 1권 부제는 ‘몸의 기억과 마주하는 여성들’인데, 폭력, 장애, 일과 관련된 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말하는 몸> 2권의 부제는 ‘몸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여성들’. 연대 역시 몸의 일이다. 타인의 몸에 참견하기를 그만두어야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비로소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정연하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는 음악뿐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직업인 아이돌에 대해 말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든 살인적인 스케줄과 물샐틈없는 사생활의 차단. 결국 이런 시스템이 케이팝을 단단하게 받치는 셈”이라는 지적은 케이팝을 좋아하는 사람이자 케이팝에 대해 말하고 쓰는 사람으로서의 딜레마를 담고 있다. 배우 김꽃비는 바이크가 페미니즘적인 수행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는 바이크를 타고 가벼운 차별부터 여성혐오적 발언을 다양하게 듣다가 아예 페미니스트 라이더를 모아 ‘치맛바람 라이더스’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함께 바이크를 타고, 다른 여성들의 바이크 입문을 돕는다.

암 생존자 정지혜는 “암을 치료한다기보다는 암에 대한 인식과 싸운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라고 한다. 아픈 사람에게도 욕구가 있고 일이 필요하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다. 그는 아파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암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최근 여성의 몸, 여성의 말은 출판계에서 큰 흐름이 되었다. 여성의 몸을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맞춰야 하는 물적 대상이 아니라 힘을 갖고 행동하는 주체로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은 운동과 신체 긍정주의라는 흐름을 만들었다. 여성의 말을 듣는다는 시도는 가장 페미니즘적인 것으로, 여성이 말하게 하자는 데서 시작한다. 사적인 경험을 공적 기록의 장으로 끌어내자는 말. 말을 가능하면 그대로 적어, 여러 사람의 경우를 한번에 들을 수 있게 하자는 생각은 2021년 벽두 <말하는 몸>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내일을 위한 내 일> 등 여성 인터뷰집의 잇단 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더 많은 여성의 더 많은 말이 필요하다. 들으면 들을수록 모르는 것들이 더 많아지니까. <말하는 몸> 2권 마지막 인터뷰이는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김진숙. 그가 해고를 당한 사유는 1986년에 대공분실에 끌려가서였다.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너 같은 빨갱이 잡아오는 데”라는 말을 듣고 그는 오히려 안심했다고 한다. 자신은 빨갱이가 아니라 노동조합원이니 잘못 보고 잡아왔다고 믿어서다. 노동조합 들어가면 다 빨갱이고 불순분자고 얼마든 해고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가 다시 태어나도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말을 맺는 순간 느끼는 해방감은 두 권의 책에서 만난 88명의 목소리 덕분이다. 개선해야 하는 몸, 타인이 승인하는 몸, 완벽을 향해 늘 매달려야 하는 몸이 아니라,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부터가 중요하다. 타인의 온기를 믿는 일은 내 몸의 생김에 신경을 곤두세우기를 멈추면,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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