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9명 학적부 샅샅이..일제 민족차별 '현미경 해부'

김진철 2021. 1. 2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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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개교한 강경상업학교 1489명 학적부 뒤져 '일상 차별' 실증
"조선족·탈북민·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 극복해야 한국사회 선진화"
1920년 강경상업학교 학생들이 연합체조를 하는 모습. 푸른역사 제공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중등학교 입학부터 취업 이후까지
정연태 지음/푸른역사·2만원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작고 세밀한 세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하는 통찰이다. 개략은 쉽게 보이지만 세부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지 않고 파악하기 어렵다. 주제의식이 막강한 언설일수록 자세히 들여다 보면 허술하고 엉성한 경우가 많은 것도 같은 이치다. 거대담론을 뒷받침하는 작은 이야기들의 소중함을 잊는 경우가 많은데, 세상이 혼탁하고 대결구도가 복잡다단할수록 ‘디테일’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는 그래서, 무척 반가운 저작이다. 식민지 시기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 지배는 다양한 차별을 깔고, 이를 무기 삼아 진행됐다. 한반도에 살아온 한국인들이 일본인들로부터 극심한 차별적 지배를 받았음을 모르는 이는 없으나, 그 차별의 구체는 모호한 대목으로 남아 있다. 이 책을 지은 정연태 교수(가톨릭대 국사학과)는 민족차별이라는 담론의 세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파헤쳤다.

연구방법론부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부제 ‘중등학교 입학부터 취업 이후까지’는 저작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는가를 보여준다. ‘중등학교’는 지금도 충남 논산시 강경읍 남교리에 있는 강경상업고등학교다. 1920년 전국에서 일곱번째로 설립된 상업학교다. 저자는 민족 차별의 고갱이를 식민지 교육에서 찾기로 하고, 그중에서도 충분히 공개된 법적·제도적 차별 외에 관행적 차별에 주목한다.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해 교육함으로써 민족차별이 노골화한 초등학교와 인문계 중등학교보다는, 최소한 제도적으로 시험을 통해 선발한 일정 수준의 한·일 학생을 같은 교육시설에서 같은 교육과정에 따라 지도하고 교육한 상업학교를 연구·분석 대상으로 설정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데이터베이스화의 규모다. 개교 이래 해방 전까지 25년간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한 한·일 학생 977명, 중퇴생 512명 등 모두 1489명의 학적부를 일일이 컴퓨터에 기입해 분석했다. 이 정도의 학적부 분석은 국내 연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시도다. 여기에 한국 근대사 연구 최초로 교지에 첨부된 ‘동창회 회원명부’, 해방 전후 동창회가 발행한 ‘동창회 명부’ 등도 모두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됐다. 이밖에도 교지와 학생들의 일기, 한·일 두 나라 졸업생의 동창회보뿐 아니라 면담·구술 자료까지 이 책의 바탕을 이룬다. 미시 연구의 치밀함을 보여주는 단적 사례다.

1930년 강경상업학교 졸업기념사진. 푸른역사 제공

민족차별은 신입생 선발부터 졸업과 이후 취업까지 일관되게 대단히 세부적으로 이뤄졌다. 입학 시험 경쟁률이 우선 그렇다. 한국인의 입학경쟁률은 최저 4.3대 1(1921년)이었고 가장 높을 때는 15.3대 1(1927년)까지 치솟았다. 반면 일본인은 최저 1.0대 1(1921년), 최고 2.6대 1(1932년)에 그쳤다. 형식적으론 민족 구별 없이 지원할 수 있었지만 실질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한국인이 많이 지원하기도 했으나 그만큼 뽑히기도 어려웠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실제로 당시 강경 일대 한국인 사회에서 민족차별적 선발 관행에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던 것은 1925년이었다. 그해 일본인은 40여명이 지원해 29명이 합격했지만 한국인은 120여명 지원자 중 21명만 합격하자, “인구 비례로 보아도 1할도 못 되는 일본인을 9할 이상인 조선인보다 많이 수용함은 무슨 까닭인가” 등 학부형들의 항의가 있었다고 당시 신문이 보도했다.

학생지도에 있어서도 민족차별은 뚜렷했다. 졸업생 1인당 평균 징계 건수는, 한국인이 0.25건(118건/481명)이었고 일본인은 0.13건(39건/300명)이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일제 말기로 갈수록 더욱 강화되어 1940년을 기준으로 한국인의 평균 징계 건수는 0.18건에서 0.33건으로 늘어난다. 같은 방식으로 이 책은 학업 평가, 학사징계·중퇴, 취업, 취업 이후까지 세밀하게 해부해 민족차별이 일상적으로 자행됐음을 증명해낸다.

일상에서 차별을 실행한 주체는 교사다. 모든 일본인 교사가 적극적으로 차별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대개 방관함으로써 차별에 동조해온 풍토가 만연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두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한국인 학생들이 학교 강당에서 낮잠을 자다 걸렸는데 ‘강력범이나 사상범’ 대하듯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체벌을 받았다. 강당에 일왕 내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이때 여러 일본인 교사들은 방관했다 한다. 또한 억울하게 사상범으로 몰린 한국인 학생에 대해 처분 경감과 경찰 고발 중지를 요청했음에도 학생이 투옥되자 일본인 담임교사는 사직했다. 그러나 악명 높은 일본국수주의자 교사가 주도해 직원회의에서 경찰 고발을 결정하고 해당 학생이 교복 차림으로 쇠고랑을 차고 연행되는 과정에서 대다수 교사들은 침묵했다.

1936년 강경상업학교 조회 광경. 푸른역사 제공

대다수 교사들은 민족차별의식이 내면화되어 있었다. 신화와 날조된 역사에 기반한 ‘한반도 조공국 사관’에서 시작해 인종론적 문명론, 국민성론, 일선동조론 등이 뒤섞여 이들의 내면에 자리잡았고, 이를 통해 ‘문명 일본과 야만 한국’이라는 민족 서열화 구도의 한국 멸시·차별관이 심화해 일본사회와 재한 일본인사회는 물론 일본인 교수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즉, 이는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횡행하는 문제적 역사의식의 뿌리인 것이다.

저자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세심히 살피지만 숲도 놓치지 않는다. 학교에서 벌어진 민족차별은 빈부와 성별, 학력을 두고 벌어진 전체 차별의 생생한 한 부분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일본에 대한 비판에서만 끝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의 확대 역시 필수적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조선족’ 동포와 탈북민, 이주 노동자 및 결혼 이민자 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문명 대 야만’의 인식에서 벗어나 있을까? “한국사회가 새로운 근대성을 발신하는 선진사회로 대전환”하려면 “불공정하고 불합리하고 불의한 각종 차별문제부터 성찰하고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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