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 난자는 일하는 여성을 해방시킬까?

한겨레 2021. 1. 2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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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연의 여성, 과학과 만나다 ][책&생각] 임소연의 여성, 과학과 만나다
⑨보조 생식 기술과 여성
피임약 버금가는 여성해방 도구로 부상 중인 난자 냉동 기술
냉동된 난자 실제이용률 저조..남성 역할 배제된 것은 큰 한계
액체질소에 보관된 가축의 생식세포. 생식세포 동결 기술은 1946년 개구리의 정자에 처음으로 적용됐다. 인간의 정자 냉동은 그로부터 8년 뒤인 1954년에 성공했다. 위키미디어코먼스

2014년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 페이스북과 구글은 여성 직원을 대상으로 난자 냉동 비용을 지원하는 사내 복지 정책을 시작했다. 남성 비율이 높은 아이티 업계에서 여성이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받는 경력상 불이익을 방지하겠다는 취지다. 엄마가 될 것인가, 일에 전념할 것인가. 많은 20~30대 여성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는다. 난자 냉동 기술은 일하는 여성에게 아이 낳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직업적 성취를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해방적이다. 물론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남성친화적인 기업 문화나 여성의 모성을 당연시하는 사회 인식을 바꾸지 않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난자 냉동은 임신 시점을 조절하는 보조 생식 기술

난자 냉동은 가장 최근 등장한 보조 생식 기술 중 하나다. 보조 생식 기술이란 성기의 결합 없이 이루어지는 생식 과정을 보조하는 기술적 수단을 통칭하는 용어다. 좁게는 의료 기관에서 불임 상태인 남녀의 임신을 가능케 하는 데에 동원되는 기술을, 넓게는 임신과 출산을 더욱 안전하고 개선된 방식으로 진행하기 위해 고안된 모든 기술을 가리킨다.

보조 생식 기술을 적용할 때 여성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생식 과정은 배란, 수정, 임신, 분만 등 여러 단계로 분리된다. 가령 대표적인 불임 치료 기술인 시험관 시술은 배란과 수정 단계에 개입한다. 시술을 받는 여성은 과배란 유도 주사를 맞아 난자를 한 번에 여러 개 배출하고, 시술자는 채취한 난자를 정자와 인위적으로 수정시킨 뒤 여성의 몸에 집어넣는다. 이와 달리 난자 냉동은 서로 다른 생식 단계 사이에 시간적 단절을 만든다. 배란된 난자를 얼려두었다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 해동하는 기술은 현재보다 더 적절한 시점에 수정과 임신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지연시켜준다.

난자를 얼리는 행위는 임신을 할 수 있는 능력, 곧 가임력을 동결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래 난자 냉동은 조기 폐경이 예상되거나 항암 치료를 받아 가임력이 손상될 가능성이 있는 여성에게 쓰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여성도 난자 냉동을 고려하는데, 이는 가임력이 여성 신체의 생물학적 노화에 따라 감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임력 측정은 여성이 태아일 때부터 갖고 있던 원시난포의 양과 질을 척도로 한다. 여러 연구 결과는 여성이 나이가 들수록 원시난포의 수가 감소할 뿐 아니라 원시난포가 분열하며 형성되는 난모세포의 질이 떨어진다는 점을 알려준다.

‘사회적’ 난자 냉동 본격화는 2010년대부터

난자 냉동은 비교적 최근에야 대중에게 알려졌다. 인간의 난자를 동결하기가 기술적으로 쉽지 않았던 탓이다. 인간의 정자 냉동이 1950년대에 일찍이 성공했던 반면 난자 냉동은 1980년대 초에야 시도됐으며 그마저도 기존 기술로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생체 냉동 기술의 핵심은 세포 내부의 물 분자가 얼면서 생기는 뾰족한 얼음 결정이 세포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결정체의 크기를 극소화하는 데 있다. 정자를 얼릴 때는 세포의 물을 서서히 빼내고 동결 억제제로 그 자리를 대체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온도를 천천히 낮춘다. 완만 동결법이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물을 대신해 동결 억제제의 농도를 서서히 높이므로 얼음 결정을 만들지 않으면서 안전하게 정자를 냉동시킨다. 그러나 난자는 정자보다 부피가 훨씬 크고 물이 세포의 80% 이상을 차지해 같은 방식으로 수분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렵다. 기존 기술이 적용된 난자는 얼음 결정 때문에 손상되어 냉동 후 생존율이 높지 않았고 임신에 성공하더라도 배아 발달 과정에서 종종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2018년 창업한 미국의 한 난자 냉동 스타트업은 노란색 밴 차량을 이용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왔다. 이 기업은 난자 냉동을 “독립적인 여성이 되기 위한 주문”으로 홍보하며 이동식 차량 클리닉에서 여성에게 가임력의 지표가 되는 호르몬 검사를 무료로 제공한다. 사회적 난자 냉동이 상업화된 대표적 사례다. 카인드바디 누리집

냉동한 난자의 질은 1990년대 말 유리화 동결이라는 신기술이 개발되며 극적으로 변했다. 유리화 동결은 난자의 물을 제거하는 대신 고농도 동결 억제제를 넣은 액체질소를 이용하여 10초 이내의 짧은 시간 동안 온도를 빠르게 낮추는 방법이다. 냉동 과정에서 난자 속 물은 얼음이 생겨 뿌옇게 보이는 고체 결정 상태가 아닌 마치 투명한 유리처럼 액체이면서 동시에 고체인 상태에 가까워진다. 새로운 동결 방법은 냉동 시간을 단축한 것은 물론 기존 기술에서 40~60%에 불과했던 난자 생존율을 80~9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난자 냉동의 대중화는 신기술의 등장보다 조금 늦게 이루어졌다. 미국 생식의학협회는 난자 냉동에 관한 연구 결과가 충분히 쌓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리화 동결 방법이 나온 뒤에도 오랜 기간 난자 냉동을 금지했다. 금지 조치가 해제된 2012년 이후부터 미국 내에서 난자 냉동 시술이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초부터 난자 냉동이 시작됐으나 2015년을 기점으로 의학적 목적의 난자 냉동과 구분되는 ‘사회적’ 난자 냉동이 본격화됐다. 사회적 난자 냉동이란 여성이 질병과 같은 원인이 아닌 자연스러운 노화의 결과로 가임력이 감소된다는 전제하에 임신을 미루고자 난자 냉동을 택하는 현상을 말한다. 2020년 국내 한 매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난자 은행을 보유한 병원을 취재한 결과, 해당 병원에서 난자를 냉동한 여성의 90% 이상이 사회적 동기로 가임력을 보존하려는 30대 여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왜 남성은 정자 냉동을 고민하지 않을까

여성에게 20~30대는 한창 경력의 사다리를 오르는 시기이면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에 큰 변화가 생기는 시기다. 전문가들은 대략 35살을 기점으로 여성의 가임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가임력이 감소하기 전에 질 좋은 난자를 미리 냉동해두었다가 30대 중반 이후 안정된 경력과 좋은 배우자를 얻었을 때 그 난자를 꺼내 임신한다는 것이 냉동 난자 산업이 제안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여성 입장에서 불확실성과 위험이 크다. 우선 난자 채취 과정은 여성의 몸에 적지 않은 부담을 준다. 난자를 얼린다고 해서 이후 임신 및 출산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임신 성공 여부는 임신을 시도할 때의 여성의 나이와 건강 상태, 냉동 난자 보관 상태 등 여러 변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냉동된 난자의 실제 이용률 자체가 3~9% 안팎으로 낮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난자 냉동 시나리오의 가장 큰 한계는 생식 과정에 남성의 역할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남성을 위한 정자 냉동 시나리오는 없다. 정자 역시 임신에 꼭 필요한 생식세포이고, 정자 냉동이 난자 냉동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일찍 개발됐음에도 말이다. 항암 치료를 앞둔 남성이 가임력을 보존하려 의학적 목적의 정자 냉동 시술을 받기도 하지만 사회적 동기에 의한 정자 냉동은 이제껏 한 번도 사회적 난자 냉동만큼 관심을 받은 적이 없다.

남녀의 생식세포 모두 노화의 영향을 받는다. 남성의 나이가 들수록 정자의 질이 떨어지고 가임력이 감소한다는 연구도 많다. 자녀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와 조현병 등이 아빠의 나이와 연관 있다고 밝힌 한 연구는 자녀의 유전자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빈도가 아빠의 나이와 비례해 늘어난다고 설명한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유전자에서 일어나는 변이는 엄마의 나이와 무관하게 15개인 것과 대조적으로, 아빠에게 물려받은 유전자에서 일어나는 변이는 아빠의 나이가 20살일 때 25개, 40살일 때 65개 등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에도 남성의 나이와 가임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남성의 자기 인식은 턱없이 부족하다. 2020년 유럽 남성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에서 참가자의 약 75%는 생물학적 노화와 남성 가임력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거나 이에 관한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또한 80% 이상이 정자 냉동 기술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잘 모른다고 응답했다. 이들은 정자 냉동이 정자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빼앗는다고 보았으며 냉동된 정자가 악용될 소지나 정자 냉동 기술의 부작용 등을 우려하기도 했다. 미래의 가임력을 걱정하는 여성이 난자 냉동이라는 보험을 드는 것과 달리, 자신의 가임력을 확신하는 남성에게 정자 냉동은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기술로 인식됐다.

21세기에 등장한 신기술인 난자 냉동은 지난 세기에 개발된 피임약에 버금가는 여성해방의 도구로 부상 중이다. 이제 여성은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는 기술뿐 아니라 임신을 원하는 시기까지 미루는 기술을 갖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이 제시하는 해방의 시나리오는 여전히 여성의 몸에만 머물러 있다. 생식 과정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기술에 관한 온전한 논의는 남성들이 정자 냉동을 심각하게 고민한 뒤에야 가능해 보인다.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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