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학 수업의 '그냥 작가'와 '흑인 작가'

장정일 입력 2021. 1. 29. 03:46 수정 2021. 3. 2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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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제임스 볼드윈 지음, 고정아 옮김
열린책들 펴냄
ⓒ이지영 그림

작년 말에 친구들과 리처드 라이트의 장편소설 〈미국의 아들〉(창비, 2012)을 읽었고, 올해 초에 앨리스 워커의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민음사, 2009)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차례로 글로리아 네일러의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민음사, 2009)을 읽기 전에, 막간을 틈타 혼자서 제임스 볼드윈의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열린책들, 2020)을 읽었다. 이 작가들은 모두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n)’이다.

볼드윈의 소설은 뉴욕의 흑인 거주지역 빌 스트리트가 무대다. 주인공 포니와 클레멘타인은 각기 스물두 살과 열아홉 살로, 결혼을 약속하고 함께 살 집을 구하는 중이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토마토를 사기 위해 채소 가게에 들렀는데, 포니가 담배를 사러 가게를 나간 사이에 백인 청년이 클레멘타인의 몸을 더듬으며 성희롱을 했다. 뒤늦게 그 광경을 목격한 포니는 백인 청년을 패주었다. 그러자 순찰 중이던 백인 경찰 벨이 와서 포니를 폭행죄로 체포하려고 했다. 체포 위기에 몰린 포니는 채소 가게의 이탈리아계 여주인의 증언으로 가까스로 방면되지만,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데서 체면을 구긴 벨은 이때부터 포니를 감옥에 넣을 궁리를 한다.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강박 가운데, 흑인이 자신의 여자(백인 여성)를 탐내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자신의 누이와 딸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백인의 인종적 순수성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 1955년 8월, 미시시피에서 일어난 에밋 틸(1941~1955) 살해 사건이 대표적이다. 고작 열네 살이었던 에밋 틸은 백인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이유 하나로 사촌 집 방에서 끌려 나가 며칠 후 주검으로 발견됐다. 참고로 미국 인종차별 법령 중 가장 마지막으로 폐지된 것도 백인-비백인 혼인·출산 금지법(anti-miscegenation laws)으로 이 법은 1967년에야 겨우 사라졌다.

백인 남성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각종 사형(私刑)으로 단속하지 않으면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탈취해갈 것이라는 백인 남성의 강박은 미국 흑인 남성들이 백인을 조롱거리로 삼을 때 자주 등장하는 화제다. 이를테면 맬컴 X와 알렉스 헤일리가 함께 쓴 〈말콤 엑스〉(창작과비평사, 1978)에서 맬컴은 이렇게 말한다. “백인 소년들은 내가 흑인이기 때문에 으레 ‘로맨스’나 ‘섹스’에 대해서 자기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고, 여자들에게 어떻게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본능적으로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부분의 백인들이 무슨 영문으로 섹스에 비범한 재간을 갖고 있다는 명성을 흑인에게 부여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중요한 사람은 다 백인

흑인 남성의 성적 능력이 자신들보다 뛰어나며 그들이 백인 여성을 강탈할 것이라는 백인 남성의 강박은 그들이 노예시대 때 저지른 원죄에서 비롯한다. 그 시절의 백인 농장주들은 흑인 여성 노예를 거리낌 없이 강간했다. 오치 미치오의 〈와스프〉(살림, 1999)의 한 대목을 보자. “남부 대농장주들의 노예제에 대한 공공연한 집착은 면화 재배를 위한 노동력 확보에도 있었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집착은 흑인 여성 노예를 성적으로 괴롭혀도 강간죄가 적용되지 않았던 사실에 있다. 대부분의 백인 남성은 이런 악덕을 범했다.” 미국 백인 남성의 강박은 자신들이 악덕을 지었으니, 상대도 그럴 것이라는 투사(projection)의 산물이다.

앞선 설명이 역사적 기원을 드러낸다면, 리처드 다이어의 〈화이트:백인 재현의 정치학〉(컬처룩, 2020)은 이 문제에 문화이론으로 접근한다. 지은이는 백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백인성(whiteness) 자체에 성적 행동과 성적 욕망을 아우르는 섹슈얼리티(sexuality)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섹스란 서로 오염시키고, 혼합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반면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순수함을 추구하는 백인성은 더러움과 얼룩, 육체성과 물질성을 야수 즉 유색인의 것으로 치부한다. “인종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성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성관계와 성적 욕구는 백인다운 것이 아니다. 백인성을 재생산하는 수단 그 자체가 순수한 백인다운 것이 아니다.” 백인성을 숭배하면 할수록 백인 남성은 성적 불능(impotenz)에 빠지게 되고, 거기서 생긴 좌절과 시기가 흑인 남성에 대한 사형으로 표출된다.

로빈 디앤젤로의 〈백인의 취약성〉(책과함께, 2020)은 미국과 같은 인종주의 사회에서 백인 남성이 유색인 남성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백인 여성에게 도움을 주는 상황과, 포니와 같은 유색인 남성이 백인 남성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같은 유색인 여성을 구하려는 상황은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을 가진다고 말한다. 인종과 젠더 위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 백인 남성이 위기에 빠진 백인 여성을 구하게 되면 사회적 자산을 얻게 된다. 즉 그는 백인의 우월한 혈통과 가부장제를 지킨 영웅이 된다. 같은 상황에서 유색인 남성이 유색인 여성을 구하려고 할 때는, 사회적 자산을 얻기는커녕 모든 것을 잃게 된다.

포니가 그랬다. 벨은 백인을 때린 흑인을 잡아넣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고 결국엔 푸에르토리코 출신 매춘부를 강간한 죄를 날조해 포니를 감옥에 넣었다. 인종차별주의자에다 거짓말쟁이인 벨은 30대밖에 안 된 젊은 나이에 이미 공무 중에 흑인 소년 한 명을 죽인 전력이 있다. 1974년 출간된 이 소설의 현재성은 백인 경찰에 의해 숨진 흑인 청년들의 죽음에 항의하기 위해 2013년부터 시작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LivesMatter)’로 충분히 증명된다.

백인이 인류의 표준으로 여겨지는 미국의 현실은 문학 수업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미국 학생들이 읽어야 할 작가 명단에는 헤밍웨이·스타인벡·디킨슨· 도스토옙스키·마크 트웨인·제인 오스틴·셰익스피어가 들어 있다. 디앤젤로의 말에 따르면, “이 작가들은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대변한다고 여겨지며, 우리가 이들을 읽는 까닭은 우리 모두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작가라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리처드 라이트·앨리스 워커·글로리아 네일러·제임스 볼드윈은 “항상 흑인 작가로 여겨지지 그냥 작가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들은 ‘다문화 작가 주간’이나 ‘흑인 역사의 달’에 훑고 지나가는 “특정화한 부류”의 작가들이다. 〈세상과 나 사이〉(열린책들, 2016)라는 책에서 다네하시 고쓰는 “내가 어릴 때 보던 교과서에서는 조금이라도 중요한 사람들은 전부 다 백인”이었다면서 “교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로 꾸며진 감옥”이었다고 말한다. 나의 독서는 어떠한가?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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