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인종주의야
지난 1월6일(미국 워싱턴 D.C. 현지 시각)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국 의사당 난입 사건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 머리에 뿔 달린 털모자를 쓰고 상의를 벗은 채(위 사진 참조) 현장에 나타난 제이컵 챈슬리다. 미국 의사당을 습격한 폭도의 마스코트가 된 그에 관해 흥미로운 기사가 나왔다. 그는 체포된 이후 나흘 동안 굶었는데, 그 이유가 감옥에서 유기농 식사를 주지 않아서라고 한다. 비싼 유기농 식사만 고집하는 열성 트럼프 지지자의 모습은 언론에 흔히 보도되는 ‘저학력 백인 노동자’인 트럼프 지지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뿐만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랑한다” “매우 특별하다”라고 말한 CEO, 주의회 의원, 부동산업자 등도 다수가 의사당으로 난입했다. ‘사회 주류’로 보이는 이들은 왜 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하고 의사당을 습격했을까?
문제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트럼프의 열성 지지자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많은 언론의 보도대로 ‘러스트 벨트’에서 일하는 중하층의 백인 노동자들이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일까? 그렇지 않다면 트럼프 지지층을 가장 잘 설명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이런 지지자들은 왜 민주주의에 반하는 믿음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을까?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 의사당 앞에 설치한 교수대가 이런 질문들에 답변한다. 미국에서 교수대는 백인이 가해온 흑인 린치의 상징이다.
2015년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에 출마한 이래, 미국 지식인들은 유권자의 트럼프 지지 원인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펼쳤다. 〈워싱턴포스트〉 카를로스 로자다 기자에 따르면, 이 주제의 책만 100권 이상 출판되었다. 백인 노동자 계층의 경제적 소외와 인종주의가 가장 유력한 두 가설이었다. ‘세계화로 직업 안정성을 잃고 삶의 질이 떨어진 백인의 분노’ 가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주의’ 가설에 비해 훨씬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논쟁에 대한 미국 정치학계의 결론은 명백하다. 백인들이 우월한 인종적 지위를 잃는 것에 대해 느끼는 불안함과 분노가 트럼프 지지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경제적 소외감이 트럼프 지지를 설명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정치학 논문은 단 하나도 없다.
경제적 박탈감, 인종의 렌즈로 봐야
그렇다면 ‘경제적 불안으로 고통받는 백인 중하층이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주장은 얼마나 틀렸을까? 〈그림 1〉을 보자. 밴더빌트 대학의 래리 바텔스 교수가 지난해 1월에 실시한 여론조사를 직접 분석해보았다. 백인과 유색인종을 구분해 소득별 트럼프 지지를 살펴봤다. 백인 저소득층이 백인 고소득층에 비해 트럼프를 지지할 확률은 높지 않다. 유색인종의 경우, 오히려 소득이 높을수록 트럼프를 지지할 가능성이 커졌다. 인종 간 트럼프 지지 차이가 소득 간 차이보다 더 크게 나타난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투표한 유권자 전체에서 대학 교육을 받지 않고 중위소득 이하인 백인 노동자 계층은 31.2%였다. 전체 유권자 중 백인 노동자 계층의 비중(30% 초반)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계층이 특별히 트럼프를 더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트럼프 지지가 인종주의에 기반한다는 증거는 명백하다. 바텔스 교수가 개발한 지수인 ‘인종적 적대감’으로 트럼프 지지를 비교해봤다. 〈그림 2〉는 인종적 적대감에 따라 트럼프 지지율이 얼마나 변하는지 보여준다. 백인과 유색인종 모두 인종적 적대감에 따른 트럼프 지지가 매우 분명히 드러난다. 인종적 적대감이 낮으면 트럼프를 지지할 확률은 0%에 가깝다. 반면 인종적 적대감이 가장 높은 집단에서 트럼프를 지지할 확률은 90% 이상이다. 트럼프를 지지할수록 ‘백인은 차별당하고, 정부가 불공정하게 흑인·라티노·이민자를 더 지원해 그들이 과도한 권한을 가진다’고 믿는다.
이처럼 인종주의가 트럼프 지지를 설명하는 가장 큰 요소인데도, 왜 경제적 소외 가설에 주목하는 사람이 있을까? 트럼프 지지자들이 경제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 박탈감 역시 인종의 렌즈로 봐야 한다. ‘내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 인종’이 경제적으로 불공정하게 대우받는다는 인식이 트럼프 지지의 원동력이다.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 존 사이즈 교수(정치학) 등은 2016년 미국 대선을 분석한 저서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통해 경제와 인종 간의 관계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보통의 미국인들은 노력한 바에 비해 보상받지 못한다’는 질문에 64%가 동의한다. 그런데 ‘보통의 미국인(average American)’이라는 주어를 ‘흑인(black)’으로 바꾸면 응답률이 눈에 띄게 떨어진다. 트럼프 지지자 12%만 ‘흑인들은 노력한 바에 비해 보상받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힐러리 지지자들은 주어가 ‘보통의 미국인’이든 ‘흑인’이든 동일하게(57%) 응답했다. 트럼프 지지자의 분노는 자기 자신의 경제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흑인·라티노·이민자와 같은 이들이 불공정하게 혜택을 받는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트럼프는 대놓고 인종주의를 이용해왔다. 미국의 정치 관행을 크게 바꿨다. 트럼프 이전의 공화당 정치인들은 역풍을 고려했다. 인종주의를 활용하고 싶더라도, 인종을 연상하게 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트럼프 등장 이전에는 유권자들도 노골적으로 인종주의 캠페인을 벌이는 정치인을 심판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에는 노골적인 인종주의 캠페인이 마치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트럼프가 인종주의의 지옥문을 열어재낀 것이다.
미국 터프츠 대학 브라이언 샤프너 교수의 연구는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발언이 유권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성차별적·인종차별적 발언을 적극 묵인할 의향이 있다. 지인이 했다면 불편함을 느꼈을 내용이라도 그 발언자가 트럼프라면 불편하다고 느낄 확률이 20%포인트나 감소한다. 트럼프의 당선 전후 실시한 유권자 여론조사를 보면, 트럼프 지지자는 트럼프 당선 이전에 비해 이후에 20%포인트 더 성차별적·인종차별적 믿음에 동의한다.
공화당 정치인들의 묵인 혹은 동조 역시 트럼프 지지자들의 인종주의를 부추겼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인종주의를 더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캘리포니아 대학 벤저민 뉴먼 교수와 공동 연구자들은 ‘멕시코 이민자들이 마약과 범죄를 가져온다’는 트럼프의 발언이 유권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험해보았다. 일부에게는 트럼프의 발언을 보여줬고, 공화당 정치인들이 이에 동조하는지 반대하는지도 알려주었다. 참여자의 일부에게는 아예 트럼프의 발언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조사 참여자에게 동료의 인종차별 사례를 보여주고 이것을 얼마나 용납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 결과, 선입견이 강한 사람일수록 인종차별을 용인했다. 예측했던 결과다. 이 연구의 놀라운 점은 공화당 정치인의 동조·묵인을 확인한 참여자들의 반응이었다. 인종차별에 대한 선입견이 강한 집단의 경우, 공화당 정치인이 트럼프의 발언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인종차별을 용인하는 정도가 2~4배 더 강해졌다. 트럼프의 발언을 읽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하면, 인종차별을 용인하는 정도가 160배나 강해진다.
이렇게 트럼프의 선동과 공화당의 묵인이 인종주의를 미국 정치의 전면에 내세웠다. 그런데 인종주의로 뭉친 트럼프 지지자들은 왜 민주주의의 전당인 미국 의회 의사당을 습격했을까? 그들의 공격 목표는 왜 민주주의였을까. 지난 1월6일 이 습격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연구가 있다. 앞서 언급한 바텔스 교수는 ‘반민주주의적 행태를 설명하는 개인의 정치적 태도’가 무엇인지 조사했다. 그는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선거 결과를 불신하는지 △민간인이 무력 행사를 하거나 법의 사적 집행이 필요한지 △강한 리더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법을 우회할 필요가 있는지를 물었다.
민주주의조차 포기하게 하는 인종적 적대감
놀랍게도 각 질문에 대해 50% 전후로 ‘그렇다’는 대답이 나왔다. 분명 반민주주의적 태도다. 이러한 결과를 어떻게 설명할까? 바텔스 교수는 공화당에 대한 감정적 태도, 트럼프에 대한 감정적 태도, 경제적 보수주의, 문화적 보수주의, 인종적 적대감, 정치적 냉소주의 등의 변수로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지 검증해보았다. 가장 높은 예측력을 가진 변수는 단연 인종적 적대감이었다. 〈그림 3〉은 인종적 적대감과 반민주주의적 태도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공화당 지지자 중에서 인종적 적대감이 가장 낮은 집단은 반민주주의적 태도에 공감할 확률이 0%에 가깝다. 공화당 지지자 가운데 가장 높은 인종적 적대감을 가진 집단은 80~90%에 가까운 확률로 반민주주의적 태도를 지지한다. 공화당 지지자들의 인종적 박탈감과 적대감이 민주주의조차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이 2040년대에 들어서면 백인이 인구의 절반도 안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백인의 지위가 점점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다. 트럼프에 대한 두 번째 탄핵소추 그리고 바이든 대통령 취임을 맞는 2021년, 미국은 교차로 앞에 서 있다. 사회를 통합해 전 세계의 모범이 되는 다인종 민주주의로 거듭날 것인가? 혹은 인종 간 갈등이 더욱 첨예해져 민주주의의 위기로 치달을 것인가?
공화당의 미래 대권 후보들이 인종주의를 경계하고 유색인종의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면 전자의 길로 갈 것이다. 그러나 현 미국 정치제도는 장밋빛 미래를 가로막는 장벽 중 하나다. 게리맨더링으로 공화당에 더 유리한 하원, 농촌을 과대 대표하는 상원, 그리고 전국 대선 득표 3~4%포인트 차이 패배로도 백악관을 넘볼 수 있게 된 현실이 공화당 앞에 펼쳐져 있다. 이런 조건하에서 공화당은 굳이 변화를 꾀할 필요가 없기에, 2021년 1월 미국 의사당에서 펼쳐진 장면은 꽤 상징적이다.
국승민 (오클라호마 대학 정치학과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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