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쌀 구독시대[횡설수설/김선미]

김선미 논설위원 2021. 1. 2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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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지은 밥을 강된장과 함께 부드럽게 찐 호박잎에 싸 먹으면 밥이 마냥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진다. 그까짓 맛이라는 것, 고작 혀끝에 불과한 것이 이리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고 박완서 작가의 딸 호원숙 작가의 신간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중에서)

▷호 작가가 지은 밥을 상상해 본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밥알이 탱탱한 쌀밥 아니었을까. 흰 눈이 장독대 위에 내려앉듯 밥그릇에 소복하게 담긴 새하얀 쌀밥…. 쌀은 한민족의 집념이다. 카레이스키들은 본래 아열대 기후에서 가능한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중앙아시아의 동토까지 확장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쌀 경작지(5000년 전 신석기시대)가 2012년 강원도 고성에서 발견되기도 했으니 우리의 ‘밥심’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이밥에 고깃국’은 최고의 호사였다. 조선시대에 쌀이 귀해 왕족이나 이씨 양반들만 먹는다 해서 쌀밥을 이밥으로 불렀다. 하지만 살 만해지면서 쌀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탄수화물이 비만의 원흉으로 몰려서다. 통계청이 어제 발표한 지난해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역대 최저인 57.7kg으로 40년 전 소비량(132.4kg)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1950년대 550cc이던 밥공기 크기도 요즘엔 300cc 정도로 줄었다.

▷잘나가다 수난을 겪던 쌀에 반전이 일어났다. 국산 ‘명품 쌀’ 덕분이다. 쌀 소비는 줄었지만 고급 쌀의 인기는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19로 집밥을 자주 먹다 보니 ‘밥맛’이 중요해졌다. 이젠 양 대신 질이다. 국내 한 백화점은 VIP 고객을 대상으로 명품 쌀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쌀 품종과 도정 방법을 고르면 월 2회 정기 배송해준다. 아홉 종류의 쌀을 소량씩 담는 ‘쌀 샘플러 세트’도 나왔다. 백화점 업계에서 꽃 구독은 있어도 쌀 구독 서비스는 처음이다. 정기적인 구독은 일회성 배달보다 브랜드 충성심을 요구한다.

▷명품 쌀에는 명품 전략을 쓸 수 있다. 쌀은 와인처럼 테루아르(재배 환경)에 따라 맛이 달라지니 ‘맛있는 쌀’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회를 열 수 있겠다. 유명 아티스트의 작품을 라벨에 넣는 프랑스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처럼 예술과의 콜라보는 어떨까. ‘쌀쌀쌀’ 하는 흥겨운 K팝도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눈 덮인 고택에서 뜨뜻한 쌀밥 먹기는 해외여행을 대체할 코로나 힐링 여행상품이 될 것이다. 돌밥(돌아서면 밥 짓기)하느라 힘겹지만 집밥에는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이 있다. 이런저런 명품 쌀을 구독하는 재미에 돌밥 스트레스가 날아갔으면 좋겠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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