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그늘] 봉숭아꽃 핀 마을
[경향신문]
요즈음엔 보를 막아서 강물이 줄고 늪지처럼 억새풀만 무성한 곳이 많은데, 영산강은 아직도 강물이 하천을 넉넉히 채운 채 흐르고 있었다. 장마철인 연유도 있으려니 싶은 생각을 하며 강을 타고 내려가다가 나주의 작은 마을에 들렀다.
마침 마실 가는 할머니를 만났다. 어쩌다 말문을 트자 할머니는 청산유수로 말을 잘했다.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85세 할머니의 인생사를 모두 듣게 되었다. 나주 송월동에서 스물셋에 시집 와서 이곳에서 62년을 살고 있다. 삼간 겹집에 논도 많다고 들었는데 시집을 와보니 셋방살이에 땅도 한 마지기가 없어서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었다. 그나마 몇 푼 생기면 남편이 노름해서 빚까지 지고 다녔다.
밤낮으로 남의 집 일도 해가면서 삼남 이녀 자식들을 모두 고등학교 이상을 가르쳤단다. 할머니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삼십년 전에 본인이 모은 돈 이백만원을 주고 샀기에 일생의 업적에 속한다. 틈나는 대로 마을길과 동네 빈집의 풀을 뽑고 다녀서 고샅길이 반들반들하다.
사진 찍으러 가면서 다시 들려보니 집에 안 계시기에 혹시 빈집에 가셨나 해서 빈집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할머니를 만났다. 여기서 무엇하고 계시냐니까 “풀 뽑고 있제라” 하며 반기신다. 사람이 안 사는 집에서 왜 그런 일을 하시냐고 했더니 “사람이 안 사는께 뽑제라. 사람이 살면 내가 안 뽑아도 돼야.” 똑 떨어진 말씀을 하신다. “마을이 깨깟해야제, 내 집이고 남의 집이고.”
그이의 집 앞에는 봉숭아꽃이 정갈하고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김지연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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