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땅에서 사남매 키워낸 '사랑의 언어' 뒤늦게 깨달았지요"

한겨레 2021. 1. 28.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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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기억합니다] 어머니 일선님 그리는 딸의 글
필자의 부친 박성철(왼쪽)과 모친 이남순(일선·오른쪽)은 일본 유학을 거친 엘리트로 1944년 결혼해 2남2녀를 뒀다. 사진은 1954년 일본에서 찍은 것으로, 수력기계 전문가였던 부친이 미국 출장 도중에 한국전쟁이 터져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서 일한 까닭에 휴전 이후 모친이 찾아가 재회한 기념이었다. 김반아씨 제공

1964년 어머니 일선(이남순·1922~2013)님이 우리 4남매를 데리고 부산항을 떠나 브라질행 이민선을 탔을 때 수중에 미화 400달러가 전부였다. 브라질 이민을 결정한 뒤 아버지(박성철·1926~84)가 기술부분을 담당하고, 어머니가 경영하던 대동펌프 회사를 팔아 이민자금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수금 담당 직원이 돈을 모두 가지고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부득이 아버지는 뒤처지셨고 어머니와 4남매만 먼저 그해 10월 네덜란드 화물선 편으로 무모한 이민 길을 떠났다. 배가 브라질 산투스항에 도착할 때까지 10곳의 항구에 들를 때마다 어머니는 넓은 세상을 보아야 한다고 우리를 이끌고 항구도시 투어를 나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그 당시 인종차별이 심했던 남아프리카의 수도 케이프타운이었다. 훗날 어머니 자서전 정리 작업을 도우면서 어머니의 40년간 일기장을 읽어보니 남아프리카의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가 우리가 내려서 둘러본 바로 그곳에서 그해에 종신형을 받았다.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서) 나는 죽음을 각오한다”라는 법정 선언을 한 만델라를 어머니는 존경했다. 어머니가 읽던 넬슨 만델라의 전기를 이제 내가 간직하고 있다.

1949년 서울에 살 때. 왼쪽부터 둘째딸 박은명(반아), 어머니 이남순과 큰아들 세진, 큰딸 옥경씨. 김반아씨 제공

어머니와 살아온 삶을 회상해 볼 때면 나는 게리 채프먼의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떠올리게 된다. 하나 칭찬과 격려의 말, 둘 다정한 시간, 셋 선물, 넷 봉사, 다섯 스킨십. 우리가 자랄 때 어머니는 회사의 경영을 맡은 직장인이었기 때문에 매일 일을 나가셨고, ‘우리 딸~, 우리 아들~’ 하는 식의 자상한 스타일은 전혀 아니었다.

어머니는 1958년 서울 생산성본부에서 한국 첫 기업경영 과정을 홍일점으로 수료한 이래 집안 살림과 자녀 양육 전반을 기업경영의 원칙에 따라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 운영하셨다. 우리 가족이 1968년 브라질에서 캐나다로 2차 이민을 갔을 때 부모님은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자녀 넷을 토론토대학에 보낸다는 목표를 세우고,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집을 구해 트롤리를 타고 다니며 여섯 식구를 위한 장을 보셨고, 그 덕분에 4년째 되는 해에 나를 포함한 셋은 토론토대학에, 언니는 메길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일찍부터 외조부(이종만)의 밥상머리 교육을 받았다. 외조부는 막내딸을 1937년 <광업조선>에도 실린 ‘대동콘체른’의 후계자로 점찍으신 듯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해주려 했고, 어머니는 대동사상을 가진 기업가였던 외조부의 가르침을 스펀지같이 흡수했다.

2006년 귀국해 제주에 정착한 모친이 2011년 뇌수술을 받게 됐을 때 각국에 흩어져있던 4남매가 모처럼 모였다. 왼쪽부터 사회학 박사 박세진, 인류학 박사 옥경, 교육철학 박사 은명(반아), 한국 에미서리 대표인 막내 유진씨. 김반아씨 제공

어머니 특유의 ‘사랑의 언어’에 대해서는 88살 되던 해에 펴낸 자서전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2010·정신세계사)에 우리 4남매가 각각 한 편의 글을 쓰면서 공통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인생의 망망한 대해를 헤쳐가는 불굴의 용기와 하늘에 닿아있는 영적 안테나였다. 수호신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믿음을 지녔던 어머니 앞에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수호천사가 나타나곤 했다.

6·25전쟁이 발발해 서울에서 피난할 때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기차를 지키던 군인은 어머니에게 올라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브라질행 이민선에서 만난 중국인 선원 ‘라오’는 상파울루에 잘 정착하도록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주었으며, 모두 일하러 나가야 할 때 어머니는 어린 막내아들 유진을 일본계 교장 요시무라 신부가 운영하는 가톨릭학교에 전액 학비면제로 입학시켰고, 3년 뒤 유진은 전교 일등으로 졸업을 하는 경사를 맞이했다.

상파울루에서 재봉사로 일자리를 구할 때와 언니와 내가 코티아(KOTIA) 일본노동협동조합에서 일자리를 찾을 때도 어머니의 유창한 일본어 덕분에 가능했다. 1975년 어머니는 캐나다 국적이었기에 28년간 생이별 했던 외조부를 만나러 평양에 갈 수 있었다. 그때 평양에서 3박4일 부녀 상봉을 하고 돌아온 뒤부터 ‘남북의 영세중립평화통일’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나 역시 중립화운동가가 되었다. 북한이 일찍부터 ‘비동맹 중립’ 외교정책을 추구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 생각한다.

둘째딸/김반아 영성운동가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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