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주먹 선한 의지로 살아낸 구십평생 나날이 기적이었네"

한겨레 2021. 1. 2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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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기억합니다] 선친에게 올리는 아들의 글
2018년 늦가을 어머니 구순 때 낙상으로 휠체어 탄 아버지와 고향집 마당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 사진. 오른쪽 셋째가 필자 김종선씨이다. 김종선 주주통신원 제공

십대초반 가장되어 4명 동생 부양
면사무소 ‘소사’ 이어 군청 공무원
폭풍우 눈보라에도 자전거 출퇴근
두 동생·6남매 대학교육 뒷바라지

‘주어진 일 최선 다해 배우고 실천’

아버지(김봉규·1927~2019)는 함평천지라 불리는, 전남 함평의 넓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 할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소학교를 다녔다. 1940년께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할머니와 네 명의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어머니(김영금)는 방 한 칸과 부엌 하나만 달랑 있는 집안으로 시집을 오셨다. 그나마 방이 좁아 새 신부는 어쩔 수 없이 밤이면 남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잠을 구걸해야 했다. 그때 아버지는 소사(小使)로 면사무소에 다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물레를 잣거나 베를 짜서 장에 내다 팔거나 닭을 쳐서 살림에 보태었다.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온식구가 근면 절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등은 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켤 수 있었고 옷이나 종이는 닳아서 없어지도록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군청 공무원으로 직장을 옮기신 뒤에도 이십 여리나 되는 거리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자전거로 출퇴근하였다. 여름 장마철의 폭풍우와 추운 겨울의 눈보라를 헤치며 집에 돌아오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가 태어났던 향촌은 유교문화를 미풍양속으로 여기던 곳이었다. 한학을 하던 분들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을 주위에 산재하여 있던 친족들은 문중의 일원으로 시제를 비롯하여 모든 대소사를 함께 치르며 전통을 받들었다. 힘들고 가난하던 시절이라 종원들은 함께 도와야 살아갈 수 있었다. 없는 물건을 서로 빌려주고 바꿔쓰며 부족함을 이겨냈다. 가문의 명예가 도덕적인 면에서는 자손들을 올바르게 키워내는 힘이기도 하였다. 할머니와 아버지도 유생(儒生)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 경서(經書)를 읽어본 뒤에야 할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을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비록 소학교만 다니셨지만, 두 명의 남동생과 여섯 명의 자식을 대학에 보내주셨다. 동생 네 분과 자식 일곱 명(5녀2남)을 가르치고 가정을 이루게 하였으니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라는 말로 어찌 그 과정을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필자의 부친 김봉규씨는 2018년 낙상으로 다친 이후 끝내 회복하지 못한채 이듬해 별세했다. 향년 92.

2018년 10월 15일 서울 화곡 전철역에서 전화가 왔다. 어르신이 넘어졌으니 모시러 오라는 것이다. 커다란 고목이 쓰러진 느낌을 받으며 황망히 달려갔다. 아버지의 이마에는 주먹 크기의 혹이 올라와 있었다. 얼굴 쪽으로 넘어지신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와 함께 병이 깊어 갔다. 이듬해 봄이 되자 병세가 더욱 심해지더니 혼자서는 거동을 못하게 되었다. 가을이 되자 손발을 묶고 코에 삽관을 하였다. 그때부터 강하고 엄격하며 말씀이 없으셨던 분이 자식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어머니에게도 처음으로 ‘고생했네, 사랑하네’라고 하셨다. 오랜 기다림 속에 겨우 듣는 아버지의 말씀이었지만 오히려 자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찾아뵈면 희미하게 웃는 낯으로 힘드니 돌아가라고 손짓을 하였다.

임종 즈음에 아버지에게 하나님을 영접하도록 권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유가의 후생으로 남기를 바라셨다. 비록 정식으로 한문이나 유학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자라던 환경에서 배양된 그 유산을 버리지 않고 늘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고자 하셨다.

아버지의 일생을 돌아보면 ‘발분망식’(發憤忘食)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주어진 시간과 일에 최선을 다하며 배우고 실천하기. 주위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도우며 함께 살려는 선한 의지. 일제강점기와 6·25 그리고 굴곡의 현대사를 살아오면서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가부장의 권위적인 모습을 버리지 못하였지만 내 나이 고희에 접어들면서 기억나는 아버지의 일생은 하루하루가 기적 그 자체였다.

필자의 모친 김영금씨가 지난해 가을 고추밭 농사를 짓고 있다. 김종선 주주통신원 제공

올해 아흔셋 되신 어머니는 요즘도 매일 밭으로 향하신다. 두 무릎의 연골을 수술하고 허리뼈도 상하신 어머니는 구부러진 허리와 땅이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이다. 이제는 그만 쉬시라는 자식들의 성화에도 땅은 속이지 않고 우리 몸은 죽으면 썩어 없어진다는 말씀으로 우리의 게으름을 탓하신다.

둘째 아들/김종선 주주통신원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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