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달려온 스가, 도대체 미국 대통령과 통화 순서가 뭐길래..
해당국 중요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것이 외교 현실
외교관들이 입에 달고 사는 격언 중에 “외교는 의전이고, 의전은 순서다”라는 말이 있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외교 무대에서 한 국가가 같은 주권국가인 타국을 향해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낼 수 없으니, 의전을 통해 우회적으로 뜻을 드러낸다는 의미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의전 중에 가장 중요한 의전은 정상회담이다. 외교는 의전이고 의전은 순서이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이 누구에게 먼저 전화를 거는지는 미국의 외교 우선순위를 알려주는 정직한 바로미터가 된다. 그리고 이 순서에는 나름의 공식이 있다. 첫째, 이웃 나라, 둘째 유럽의 주요 동맹과 이스라엘, 셋째 아시아의 주요 동맹 순이다.
20일 취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도 이 공식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셋째 날인 22일 이웃 나라인 캐나다, 23일엔 국경을 맞댄 또다른 이웃 멕시코와 ‘특별한 동맹’인 영국, 24일과 25일엔 유럽의 주요 동맹국인 프랑스, 독일과 각각 정상통화를 진행했다. 이어 26일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 연장이라는 중대 현안이 걸려 있는 러시아를 거쳐 27일 인도·태평양 지역의 주요 동맹인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와 전화를 주고 받았다. 이 순서는 앞으로도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각국 정상 통화 순서
-22일 캐나다 -23일 멕시코·영국 -24일 프랑스 -25일 독일 -26일 러시아 -27일 일본
미-중의 전략 경쟁으로 점차 중요도가 높아지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일 동맹은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제1동맹이다. 그래서 미국은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초석(cornerstone)이란 말로 표현한다. 지난 네명의 미국 대통령의 전례를 봐도 새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대통령보다 일본의 총리와 먼저 통화했다. 대면 정상회담의 순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총리는 새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2~3월에 미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하지만, 한국은 그보다 늦은 5~6월에 회담을 진행했다. 유일한 예외는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새로 취임한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의 장점을 설명하기 위해 3월 초로 정상회담 일정을 잡았다. 하지만, 미국의 대북 정책이 충분히 검토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뤄진 이 방문은 최악의 외교 실패로 끝나고 만다.
■ 역대 미 행정부 출범 이후 한국, 일본 정상간의 통화 순서
△조지 부시 1기 행정부
2001년 1월24일 부시-모리
2001년 1월25일 부시-김대중
△오바마 1기 행정부
2009년 1월28일 오바마-아소
2009년 2월3일 오바마-이명박
△트럼프 행정부
2017년 1월28일 트럼프-아베
2017년 1월30일 트럼프-황교안(대통령 대행)
△바이든 행정부
2021년 1월27일 바이든-스가
? 바이든-문 대통령
과연 바이든 대통령은 어떨까. 코로나19에 대한 성공적 대응 등으로 최근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급격히 올라가며 바이든 대통령이 한·일 정상과 최소한 ‘같은 날’에 통화할 것이라는 예측이 주를 이뤘다. 미국에 한국은 자신들이 피를 흘려 지켜낸 동맹이자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데 성공한 ‘모범생’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미 동맹에 핵심축(linchpin)이란 특별한 용어를 사용한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최근 더 높아져 세계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의 모임인 ‘D-10’에 드는 주요 국가로 성장하게 됐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엔 한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 등 인도-태평양 지역의 동맹국 정상과 같은 날(2020년 11월11일) 통화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일본과는 통화했는데 왜 아직 한국과는 통화하지 않느냐는 볼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아직 연락이 없는 정확한 이유를 알긴 힘들다. 일부에선 한-미 정상의 통화가 예상된 상황에서 26일 한-중 정상의 통화가 먼저 이뤄졌기 때문에 미국이 이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해석한다. 일리 있는 얘기지만,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자신의 전전임자인 존 볼턴처럼 백악관 내부 의사결정 과정을 낱낱이 폭로하는 회고록을 쓰지 않는 한 정확한 진상이 공개되진 않을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미-일 정상의 첫 전화 회담 소식을 전하는 일본 언론의 반응이다. 일본 언론들은 28일 바이든 대통령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일본에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전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산케이신문>은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자신의 거처인 “도쿄 아카사카의 중의원 숙소에 귀가했다가 심야에 다시 총리 공저로 향했다”고 밝혔다. 실제, 27일 일본 총리동정을 확인하면, 스가 총리는 이날 밤 11시47분에 공저로 돌아와 한 시간 뒤인 28일 0시47분에 통화에 임했다. 이 통화가 이뤄지기 직전까지도 일본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언제 통화가 이뤄질지 모른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미국이 ‘그야말로’ 갑자기 전화 회담을 제의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이 한밤 중에 타국 정상을 불러내는 일종의 ‘외교적 결례’를 범한 이유에 대해 <니혼게이자이신문>은 78살로 고령인 바이든 대통령의 나이를 꼽고 있다. 미-일 간의 시차를 고려할 때 바이든 대통령이 가장 쾌적한 상태에서 통화할 수 있는 오전 10~11시를 골랐다는 것이다.
미국은 청와대엔 몇시쯤 전화를 걸어올까. 오늘 밤이라도 백악관에서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 오면, 문 대통령도 퇴근했던 스가 총리처럼 전화가 앞에 불려와야할지 모른다. 미국 대통령이 “전화하자”고 요청하는데, “밤이 늦었다”며 거절할 수 있는 국가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길윤형 김지은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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