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시 됐던 통념에 도전한 실천적 진보지식인

입력 2021. 1. 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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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의 아들 되어 장원급제 한림학사하고 출장입상하여 공명신퇴하고 두 공주와 여섯 낭자로 더불어 즐기던 것이 다 하룻밤 꿈이라…필연 사부가 나의 염려의 그릇함을 알고 나로 하여금 이 꿈을 꾸어 인간 부귀와 남녀 정욕이 다 허사인 줄 알게 함이로다.’
“성진아, 인간 부귀를 지내니 과연 어떠하더뇨?”
“성진이 이미 깨달았나이다. 사부가 자비하사 하룻밤 꿈으로 제자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니 사부의 은혜를 천만겁이라도 갚기 어렵도소이다.”
“…‘장주가 꿈에 나비 되었다가 나비가 다시 장주 되니’, 어느 것이 거짓이요, 어느 것이 참인 줄 분변치 못하나니, 어제 성진과 소유가 어느 것은 정말 꿈이요 어느 것은 꿈이 아니더뇨?”>

<구운몽(九雲夢)>의 한 대목, 제자 성진과 스승 육관대사의 문답이다. 성진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다 성취한 인물. 벼슬은 승상에 오르고 부인으로 공주가 두 명에 첩이 여섯이다. 거기에 자신을 더해 구운몽의 아홉이다. 인생의 허무를 느끼던 가을날, 고승의 지팡이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보니 온갖 영화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손에는 염주를 들고 까까머리를 한 행자, 자신의 모습. 부귀영화의 한 생이 남가일몽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꿈과 현실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제자를 향해 장자가 나비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꾸었는지, ‘호접몽(胡蝶夢)’의 비유를 들면서 그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고 스승은 가르치고 있다.

문학관 내부 전시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이자 소설가이다. 송시열의 스승인 예학의 대가 김장생의 증손이다. 숙종의 초비(初妃) 인경왕후의 숙부이기도 하다. 아버지(김익겸)가 정축호란 때 순절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어머니는 궁색한 살림 중에도 필요한 서책을 구입하면서 값을 묻지 않았으며 직접 <소학> <사략> 등을 가르치며 아비 없는 자식에 대한 정성과 희생을 다했다고 한다. 그가 훗날 소설을 좋아하는 노모를 위해 <사씨남정기> <구운몽> 등의 한글소설을 남기게 된 것도 그런 이유이다.

16세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한 뒤 166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는 질녀가 세자빈에 책봉되면서 승승장구하다가 서인의 몰락으로 비운을 맛보기도 하고, 복귀하여 대사헌과 대제학에 오르는 등 정치적 부침을 거듭했다. 1687년 문신 조사석이 우의정에 오르자 “항간에 동평군 이항과 가까이 지내며 후궁 장희빈과 결탁, 출세했다는 말이 떠돈다”고 비판했다가 숙종의 진노를 불러 파직, 선천으로 유배된다. 이듬해 풀려나지만 1689년 장희빈의 아들에게 원자의 휘호를 정하라는 숙종의 명에 반대하는 서인들이 숙청(기사환국)되면서 김만중은 53세에 다시 남해로 유배의 길을 떠난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사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 참석하지도 못했고, 3년2개월 유배를 끝으로 1692년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재남해문양질배절도(在南海聞兩姪配絶島)’ 유배 당시 비탄과 절망 속에서 지은 시다.

김만중은 남해에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집필하여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장희빈을 옹호했던 숙종을 참회시키고자 했다고 문학관 측은 설명하고 있다. 1974년 <서포소설의 연구> 논문(김무조)에서 용문사 명칭 등을 근거로 남해 집필 주장이 처음 나온 이후 대체로 그렇게 알려졌다. 그러나 1988년 일본 천리대 도서관에서 ‘서포연보(일대기)’가 발견됨으로써 <구운몽>의 저작은 선천 귀양 때 시작하여 남해 귀양 중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운몽>은 우아하고 품위 있는 한글언어로 씌어졌다. 현실-꿈-현실로 바뀌는 이야기의 전개, 8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의 심리묘사, 유불선을 아우르는 철학적 깊이 등 여러 측면에서 작자의 뛰어난 창작력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러한 작품의 품격은 한글소설이면서 당시 식자계층까지 독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구운몽>은 고소설 창작의 전형적인 모범을 제시하며 우리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춘향전>과 더불어 고소설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남해유배문학관’. 한글로 쓰인 부드러우면서도 굳센 기개가 느껴지는 필체. 건물 정면 현판과 전시실 곳곳에도 이 서체가 걸려 있다. 1968년~1988년까지 20년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을 펴낸 우리시대의 유배객, 신영복 선생의 글씨다.

김만중은 소설 외에 논평을 통해서도 당대에 금기시 됐던 통념에 도전하며 실천적 진보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포만필>에서 그는 중국 중심주의의 문화관 ‘화이론(華夷論)’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제기한다. 주자학이 대세를 이루던 당시, 주자가 인도의 불경이 중국의 고전인 <열자>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고 본 아전인수식 주장, 중국의 시에만 각운이 등장한다고 오해한 점 등을 들어 주자의 문화관이 주위나라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했다고 비판했다.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은 굴원의 <이소(離騷)>와 맞먹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중국문학만이 가치 있다는 인식에 반론을 제기했다. 또 배불숭유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불교의 ‘공(空)’사상을 작품의 주제를 등장시키고, 불교적 언어를 거침없이 사용함으로써 유불선을 넘나드는 걸림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그 말에 따라 리듬을 갖춘다면, 똑같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과 통할 수 있는 것이지 중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내버려 두고 다른 나라 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한문을 ‘타국지언(他國之言)’으로, 타국지언을 앵무새의 말로 표현한 <서포만필>의 이 대목은 그의 자주적 사유의 절정을 보여준다.

문학관 현관에 ‘유배문학의 산실, 일점선도남해(一点仙島南海)’라고 쓰인 글 아래 서포의 초상화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698년 관직이 복구되고 그의 효행에 대해 정표가 내려졌다.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서포집> <고시선> 등을 남겼다. 

김만중의 유배지는 유배문학관에서 남으로 더 내려간 ‘노도’, 삿갓처럼 생겨 ‘삿갓섬’으로도 불리는 작은 섬이다. 남해 벽련항에서 배를 타고 가야 한다. 한글을 사랑했던 대문호 김만중은 1692년 여기서 생을 마쳤다. 이곳에 잠시 묻혔다가 아들이 이장해 갔다. 선창 입구에 ‘서포 김만중 선생 유허비’가 서 있다.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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