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에 움튼 겨울눈, 봄을 향한 나무의 마음인 듯
[서울&] [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계곡 물소리 아직 얼음장에 가려지고
짙은 안개에 소나무 숲길 끝 안보여도
나무는 온몸으로 새봄 신호 내보내니
겨울 숲 차가움 속 봄을 먼저 느낀다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 900년 된 등나무가 있다. 예사롭지 않은 모습에 보는 사람 마음에서 긴장이 가시지 않는다.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소문난 삼청동 숲과 계곡의 흔적을 보고 백악산(북악산)을 넘었다. 소나무 보호 군락지를 비롯해서 길 곳곳에 있는 소나무 숲에 안개가 자욱해서 신비스러웠다. 백석동천, 옛사람의 별서가 있던 숲은 지금도 사람들 마음을 씻어준다. 백석동천 계곡 얼음장 아래 흐르는 물소리가 낭랑하다. 겨울 숲을 걸으며 봄의 기운을 느꼈다.
900년 등나무
뒤틀리고 구멍 난 줄기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듯 땅에 누워 뻗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위로 자랐다. 철골 구조물을 휘감으며 퍼져나간 넝쿨마저 힘겨워 보인다.한순간도 허투루 산 적 없을 것 같은 그 모습을 보는 사람도 긴장을 늦출 수 없 다. 저 한 몸으로 견딘 시간, 900년. 서울 삼청동 등 나무가 살아온 900년 세월 앞에 사람들이 붙인 작위가 천연기념물이다. 그 단어 하나로 900년 등나무를 말하기에 턱없이 모자란다. 종로구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 900년 세월을 딛고 매일 아침 새로운 하루를 여는 생명이 있다. 그곳에 있는 측백나무는 수령이 300년이니, 등나무에 비하면 한참 어리다. 측백나무 또한 천연기념물이다.
국무총리 공관 정문 앞길 건너편 건물 뒤로 빼꼼 보이는 절벽에 ‘삼청동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건물과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삼청동은 예로부터 그 풍경이 빼어났다고 한다. 백악산 남쪽 기슭 숲과 계곡이 만든 아름다운 풍경이 시작되는 곳에 ‘삼청동문’이라는 글자를 새긴 것이다. 조선시대에 양반집 부인들이 출입을 금지한 이 계곡에 나들이를 나왔다가 관아에 끌려간 일도 있었다고 하니, 삼청동 골짜기의 풍경이 어땠을지 짐작해본다.
삼청동과 화동 접경 지역에 조선시대 궁중 전용 우물인 복정우물이 있었다. 옛 이름은 ‘복줏물’이었다. 그만큼 이곳 물이 맑고 좋았다. 삼청동 골짜기의 옛 모습이 삼청공원 북쪽에 조금 남아 있다. 작은 계곡에 숲이 우거졌다.
그 풍경을 보고 삼청공원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널찍한 산책로 숲길을 따라 걷다가 말바위로 올라가는 이정표를 보았다. 그 길을 따라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간다. 구불거리며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 사이로 걷는다. 짙은 안개가 길 끝을 지웠다. 숲을 장악한 듯 사라지지 않는 안개 속으로 계속 걸었다.
안개에 휩싸인 소나무 숲, 백악산을 넘다
말바위 바로 아래 커다란 소나무가 가지를 넓게 퍼뜨렸다. 그 옆에 기름틀 바위가 있다. 옛날에 기름을 짜는 기구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기름틀 바위 바로 위가 말바위다. 전망대가 있지만 자욱한 안개 때문에 도심 풍경이 희미하다. 말바위 옆 솔숲에서 잠시 쉰다. 바위 위에 자란 소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뤘다.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다.
길은 한양도성 성곽과 만난다.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한양도성 북대문인 숙정문이 나온다. 숙정문부터 백악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길은 소나무 숲이 좋다.
숙정문을 지나면 소나무 보호 군락지가 나온다.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 줄기가 교차하고 겹치며 자랐다. 푸른 솔잎이 하늘을 가렸다. 안개 자욱한 소나무 숲이 신비로웠다. 먼 데 풍경이 희미하다. 성곽 앞 소나무 솔잎 끝에 물방울이 맺혔다. 안개의 알갱이가 모여 이슬처럼 맺힌 것이다.
청운대 가는 길
청운대 언덕 위 소나무 몇 그루가 안개에 싸여 희미하게 보인다. 청운대를 알리는 비석 옆에 소나무 몇 그루, 그 아래 의자들이 놓여 있다. 어린 백목련에 겨울눈이 움처럼 맺혔다. 겨울눈이 대부분 북쪽을 본다고 해서 목련을 북향화(北向花)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겨울눈은 꽃이 되거나 잎이 된다고 하니 봄이 눈앞에 온 것 같았다.
백악산 정상을 앞두고 빨갛고 하얀 표시를 해놓은 소나무를 만났다. ‘1·21사태 소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68년 1월21일 북한 124군 부대 소속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사건을 1·21사태라고 하는데, 당시 교전 중에 이 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았다.
백악산 정상도 안개에 휩싸였다. 걷힐 기미 없는 안개를 뚫고 창의문 쪽으로 향했다. 창의문에서 백사실 계곡을 지나 평창동에 있는 오래된 나무를 보려 했으나 안개 때문에 다음날을 기약했다.
창덕궁 뽕나무와 백사실 계곡
파란 하늘 아래 창덕궁을 먼저 들른 것은 지난해 가을에 보지 못한 뽕나무 한 그루 때문이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창덕궁 뽕나무는 수령이 약 400년이다. 조선시대에는 궁궐 곳곳에 뽕나무를 심어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 시범을 보이는 ‘친잠례’를 거행했다고 한다. 후원 불로문 앞을 지나 관람지로 가는 길목에서 뽕나무를 만났다. 창덕궁에 남아 있는 뽕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나무다.
발길은 백사실 계곡으로 이어졌다. 백사실 계곡은 겨우내 얼었던 몸을 풀고 있었다. 영상 10도가 넘는 날씨에 계곡 얼음이 녹는지, 얼음장 아래 흐르는 물소리가 낭랑하다.
숲에 인공으로 판 연못과 정자의 주춧돌이 남아 있고, 햇볕 잘 드는 너른 터에도 주춧돌이 보인다. 조선시대 별서의 흔적이다. 풍경이 아름다워 옛사람들은 이곳을 ‘백석동천’이라 했다. 백석은 백악,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 사람 백사 이항복의 별서라는 설과 추사 김정희의 별서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의 주인이 누구였든 지금 이곳에는 서울시 보호종인 도롱뇽과 무당개구리, 오색딱따구리 등 여러 생명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산벚나무, 소나무, 아까시나무 등이 이룬 숲에서 살고 있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능금마을이 나온다. 조선시대부터 능금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능금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을에서 만난 아줌마가 1970년대까지 능금 농사를 지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금도 능금나무가 남아 있다.
다시 별서 터로 내려왔다. 계곡 물길 왼쪽 산 능선 아래 바위에 월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옛사람들은 보름달이 떠서 환한 밤이면 그 바위에 올라 달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물길을 따라 걷는다. 너럭바위가 층을 이룬 곳에 작은 폭포가 있다. 바위에 파인 골사이, 얼음장 아래로 물이 흐른다. 고개를 숙이고 그 소리를 듣는다. 그 아래 비탈진 너럭바위 폭포가 얼었다. 그 양쪽 옆에 사람 사는 집이 있다.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발길은 평창동으로 이어졌다. 럭키평창빌라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곳에서 만난 푯돌에 평창동의 유래가 적혀 있었다. 1712년(숙종 38년)에 북한산성 군량창고를 탕춘대에 설치하여 평창이라 하고 선혜청이 관리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평창동이 됐다. 그 푯돌 뒤가 럭키평창빌라다. 빌라 단지 한쪽 구석 높은 곳에 230년 넘은 소나무가 숨어 있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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