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지만 괜찮아, 신춘(新春)이잖아

이우석 입력 2021. 1. 28.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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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석의 놀고먹기

적어도 새해엔 여행할 수 있겠지. 근데 어딜 갈까.
여행은 이동이 그 원리이며 언택트 아닌 컨택트가 기본이라
전 세계가 동시에 잠잠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올드타운센트럴. 여행의 계절이 다시 돌아온다면 홍콩에 가고 싶다

●코로나가 사라지면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

어차피 지난 2020년은 별 도리가 없었다. 초미립 바이러스에 그 거대한 지구별이 마비됐다. 하늘길은 꽁꽁 묶이고 사람의 코와 입은 마스크가 걸어 잠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한 해가 그렇게 암울한 채 막을 내렸다. 판도라 상자의 맨 밑바닥에 위치한 ‘희망’이란 것이 늘 그렇듯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는 뭔가 달라지리라 슬쩍 기대해 본다. 잇단 백신 개발과 접종에 대한 소식은 반갑지만 그만큼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루 20만명씩 감염되고 3,000명 이상 죽어 나간 미국이야 백신 접종이 부작용 폐해보다 상대적으로 적겠지만 우리는 다르다. 백신(Vaccine)의 원리란 원래 특정 병에 약하게 걸려 면역을 갖는 것인 만큼 위험 요소가 상존한다.

세상은 와플 뒤집히듯 갑자기 확 바뀌기도 한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르듯 말이다. 20세기 초 당시 세계 인구의 3분의 1 정도를 감염시키고 최대 5,000만명을 사망케 했던 스페인 독감이 종식되기까지도 얼추 1년이 걸렸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부터 미국 윌슨 대통령과 데이비드 조지 영국 총리,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도 감염됐다. ‘무오년 독감’이란 이름으로 이 병을 접한 조선은 당시 약 14만명의 인구가 사망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총 3번의 대유행과 몇 차례 소유행이 전 세계를 휩쓸고 간 후, 최초로 시카고에서 발병이 보고된 지 13개월 후인 1919년 4월. 스페인 독감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이것이 바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왜 사라진 것인지 지금까지도 아무도 명확한 이유를 밝힌 바 없지만 아무튼 감쪽같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밤엔 템플 스트리트에 나갈 거다. 홍콩은 밤이 아름다우니까

그로부터 다시 1세기가 흐르고 인류는 다시 한 번 큰 위기에 직면했다. 100년 전과 달리 세계는 첨예한 정보 환경 속에서 더욱 강해진 감염병과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다만 100년 전에 그러했듯 자연의 자정능력으로 병마가 사라지길 바랄 뿐이다. 사람들도 꿈을 꾼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할 것인지, 내일 죽는다면 오늘은 무얼 할 것인지 등 먼저 조건을 만들어 놓고 대답을 찾는다. 최근엔 “코로나가 사라지면 가장 먼저 어디로 가고 싶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과연 목적지가 중요할까마는, 아무튼 기분이 좋아지는 설정이다. 질문을 받을 때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몇몇 곳을 떠올려 보니 홍콩에 가장 먼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첫 해외 여행지다.

조만간 없어질지도 모를, 붉은 글씨 간판 아래에 서 보고 싶다

●후반전을 위한 작전 타임

나를 실은 커다란 항공기가 카이탁 공항에 착륙하던 90년대 초반 8월의 어떤 날이 떠오른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신이 났다. 소풍이나 수학여행 따윈 감히 갖다 댈 바가 아니었다. 고교시절 이목을 사로잡았던 홍콩 영화 속의 공간에 들어가 (아무 짓도 하지 않더라도)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리 좋았다. 홍콩에만 갔지만 (에티켓을 익히기 위해) 거실을 장식하던 책장 속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권을 달달 외울 정도로 들여다보며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식 천국인 홍콩에서는 적어도 먹거리 걱정은 없다

지금이야 존재하는지도 모를 단수 여권(1회성 여권)을 내밀고 그 좁고 무더운 땅에 발을 디뎠더랬다. 흐린 하늘까지 가린 붉은 글씨 간판들의 교차 아래 섰다는 것에 얼마나 감동했었나. 성룡이 떨어져 내려올 것 같은 완차이의 낡은 건물, 그리고 옥상에는 류덕화가 6개 식스팩 줄줄이 캔맥주를 마시며 걸터앉아 있을 테지. 소시지처럼 찰싹 달라붙는 붉은 원피스 차림에 커다란 모자를 쓴 장만옥이 팰맬(Pall Mall) 담배를 피우며 2층 테라스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아침에 차려내는 노점에서 얌차(飮茶)로 맛본 마카로니와 토스트, 그리고 밀크티. 웃통 벗어 젖힌 아저씨가 땀을 뚝뚝 흘리며(육수가 흥건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내준 한 그릇의 완탕면과 미지근한 칼스버그 맥주의 완벽한 조합이 너무도 그리워서 그렇다. 지금의 서울 땅에서 홍콩 음식이나 미지근한 맥주 따위야 차릴 수는 있겠지만 그 습한 홍콩의 밤공기에 뒤섞인 달달한 땀 냄새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 감염병이 물러나자마자 당장 홍콩에 날아들고 싶은 이유다.

완탕면도 송화단 죽도 당장 맛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본의 아니게 지난해 1월로 내 인생의 전반전 여행이 리셋되었다. 지금은 작전을 구상하는 하프 타임. 코로나19 탓에 3대 1쯤으로 역전당하고 있는 셈이다. 후반전 여행에는, 벼락같은 골을 보상 받듯 터뜨리고 싶다. 차가운 겨울이 지나면 곧 만물이 소생할 신춘이 다가올 테니 그땐 내 여행도 덩달아 살아나겠지. 기록 사진과도 같은 풍경을 재현해 낸 영화 <추룡>(원제 <Chasing the Dragon>)을 되돌려 가며 찬찬히 들여다본다. 후반전 첫 여행의 밑그림을 그려 보기 위함이다.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 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ㆍ사진 이우석 에디터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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