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일기자의 여행>장제스 다녀간 영해루·명동 안부러웠던 창동..'근현대사 박물관'을 걷다

박경일 기자 2021. 1. 2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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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무학산 자락의 고운대(학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마산만 일대의 야경. 경사가 가파르긴 하지만 30분 남짓이면 오를 수 있는 고운대는 마산 시가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전망대다. 마산 야경은 휘황한 도심의 흰빛과 산동네 주택가 골목길의 붉은 등불로 뚜렷하게 나뉜다.
마산항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비탈진 산동네에 조성한 벽화마을 산책길 ‘가고파꼬부랑길’. 누추한 산동네 골목의 담과 벽에 동화책 속 그림을 그려 넣었다.
위 사진은 진해구청 지하주차장의 나무상자에서 찾은 화재사고 희생자를 기리는 백칠령공양지탑의 기단 부분. 화재사고의 유일한 조선인 희생자 박귀순의 이름이 보인다. 가운데는 3·15 부정선거 항의시위에 나섰다가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떠오른 김주열의 초상. 아래는 고려 때 일본 정벌에 나선 몽골 원정군이 마산 주둔 당시에 식수 확보를 위해 판 우물인 몽고정.

■ 통합 창원시의 두 도시 ‘진해·마산’

진해의 역사, 식민지시대 군항 건설되면서 시작

원래 지명은‘웅천’… 바다 진압한다는‘진해’로 바뀌어

100년된 장옥거리, 방사형 중원로터리… 시간의 두께 켜켜이

압축성장 이끌다 쇠락한 마산…‘뒤를 돌아보기 좋은’ 도시

1970년 수출자유지역으로 번성, 1980년대까지 전성기

3·15의거 발원지,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아픔의 역사도

마산시와 진해시는 2010년 7월 1일 통합시 출범으로 창원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창원과 마산, 진해가 합쳐져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면서 마산의 행정구역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바뀌었고, 진해는 창원시 진해구가 됐습니다. 100만 인구의 거대도시 탄생에 대한 기대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루아침에 도시 이름이 사라진 마산과 진해 주민의 상실감은 컸습니다.

사실 도시의 연륜으로 보나 전통으로 보나 진해나 마산은, 두 도시를 빨아들여 몸집을 키운 창원의 큰 형님뻘이었습니다. 진해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군항 도시로 조성된 근대 도시였으며, 마산은 압축성장 시대를 앞서 이끌던 대표적 공업 도시였지요. 진해와 마산, 그리고 창원은 번성한 시기가 저마다 다릅니다.

통합시의 공간과 스토리의 스펙트럼 폭이 그만큼 넓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진해와 마산을 여행한다는 건, 다른 지층에 새겨진 시간을 찾아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정의 목적지는 통합 창원시지만,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진해와 마산, 두 도시에 대한 것입니다.

# 벚꽃 없는 진해를 여행하는 법

‘진해’에서 연상되는 건 단연 ‘벚꽃’이다. 진해 벚꽃은 ‘진해 군항제’로 대표된다. 6·25전쟁 와중이던 1953년 4월 처음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추모제로 시작한 군항제는, 벚꽃 감상이 주가 되는 성대한 봄꽃 축제로 발전했다. 군항제 기간이면 진해는, 자그마치 36만 그루의 벚나무가 피워올린 분홍색 꽃 구름으로 뒤덮인다. 봄꽃 축제는 여기저기서 열리지만, 도시 전체를 벚꽃으로 환하게 밝히는 진해 군항제야말로 가장 화려한 봄꽃 축제다.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도 치러졌던 군항제가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전면 취소됐다. 5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방자치단체가 개최 예산을 확보해놓았다고는 하지만, 군항제는 올해도 열리지 못할 게 거의 틀림없다. 축제가 취소된다면 지난해처럼 벚꽃 필 무렵 여좌천, 경화역, 안민고개 등 벚꽃이 화려하기로 이름난 진해의 주요 관광지는 전면 통제된다. 벚꽃으로 한 해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의 진해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가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벚꽃이 없는, 그러니까 군항제 없는 진해는 낯설다. 꽃놀이 인파들로 가득한 벚꽃이 만개한 진해에서, 외지인들이 그동안 꽃 말고 무얼 더 본 게 있을까. ‘봄꽃 없는 진해’를 찬찬히 살피고 난 뒤에 깨닫게 된 건, 화려한 벚꽃이야말로 어쩌면 진해의 본모습을 가리는 훼방꾼일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이었다. 분명한 건, 진해는 벚꽃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진해에서 여행자들이 보아야 할 것은 ‘시간’이다. 진해에서는 시간을 여행할 수 있다. 진해의 오래된 시간은 도시 전체의 작고 사소한 곳에 무심하게 새겨져 있다. 시간의 두께는 이를테면 100년 전 지어진 일본인 장옥(長屋)거리에서 60년 넘게 군부대에서 필요로 하는 인장과 메달, 페넌트 등을 만들고 있는 ‘황해당 인판사’나 6·25전쟁 때 유엔군 포로가 된 중공군 출신이 문을 연 중국집 원해루(옛 영해루), 지금도 파는 1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지닌 ‘진해 콩맛과자’ 같은 것에 있다. 중국집 원해루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장제스(蔣介石) 전 대만 총통의 이야기가, 남원 로터리의 김구 선생 시비에서는 해방 후 귀국한 김구 선생이 삼남지역 순례 때 방문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다른 도시라면 흥분해 호들갑을 떨 만한 얘기들도, 진해에서는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퉁명스럽다. 이쯤 되니 도시 전체가 근대사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 근대가 설계한 도시, 진해

진해의 근대 풍경은 일제 수탈의 교두보였던 군산이나 목포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군산이나 목포는 이미 도시로 형성된 곳을 식민화해간 곳이었다면, 진해는 애초에 거기 살던 조선인의 토지를 빼앗아 집단 이주시킨 뒤 도시 전체를 설계했다. 군산은 도시에 근대가 틈입한 경우지만, 진해는 처음부터 근대가 설계한 뼈대부터 근대의 풍경을 가진 도시라는 얘기다.

근대의 진해는 일제 군항이 건설되면서 시작된다. 일본이 러·일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천혜의 요새로 평가받은 진해는, 전쟁 후 제국주의의 함대 주둔을 위해 설계된 도시다. 본래 진해는, 진해가 아니었다. 지금의 진해는 그때 ‘웅천(熊川)’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진해에서 30㎞쯤 떨어진 마산 서쪽 끝의 진동면. 거기가 조선 시대 ‘진해현’이었고, 대한제국 시절 ‘진해군’이었다. 웅천에다 군항을 설치하면서, 일제는 제멋대로 진해의 이름을 가져다가 썼다. ‘진압할 진(鎭)’에 ‘바다 해(海)’. ‘거친 바다를 진압한다’는 지명의 뜻이 제국주의 입맛에 딱 맞았던 모양이었다.

진해의 중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중원 로터리다. 일제는 지금은 사라진 팽나무 노거수를 중심으로 여덟 갈래의 길을 방사형으로 놓았다.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서구의 도시설계를 배워온 일제는, 이미 전근대적인 도시가 형성된 본토와는 전혀 다른 근대 도시를 진해에 구현하려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로터리다. 당시 서구 도시들은 도시로 인구가 몰리고 마차가 늘자,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도시 중심에 로터리를 만들었다. 지금은 우체국만 남았지만, 일제강점기의 옛 지도를 보면 로터리 주변에는 사진관·도서관·은행·경찰서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방사형으로 펼쳐지는 여덟 갈래의 길을 따라가면 지금도 곳곳에는 100년이 넘은 낡은 적산가옥이 있고, 군부대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근대건축이 남아 있다.

# 일본인, 진해의 역사를 기록하다

이제, 벚꽃 없는 진해로 발걸음을 이끈 책 한 권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일제강점기의 진해 이야기를 샅샅이 살핀 책이 있다. 일본 대입학원 강사였던 고베(神戶) 출신의 일본인 다케쿠니 도모야스(竹國友康)가 1999년 일본에서 발간한 ‘진해의 벚꽃’이다. 부산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당일치기로 벚꽃이 만개한 진해를 찾았던 저자는, 도시 전체가 벚꽃으로 물든 모습과 늘어선 일본식 가옥을 보고 흥미를 느껴 진해의 역사를 뒤졌고, 여러 차례 방문을 통해 기록과 증언을 꼼꼼하게 다져서 책을 썼다. ‘진해의 벚꽃’은 진해에서 해설사로 활동하는 은퇴한 고교 교사 이애옥 씨에 의해 20년 만에 번역돼 국내에서 나왔다.

삼포왜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진해의 역사가 이 책 안에 있다. 군항과 도시건설 과정부터 진해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및 당시의 사회상이 생생하다. 책이 가진 최고의 가치는 공들여 정리한 역사의 기록에 있지만, 식민지 공간을 보는 일본인 저자의 시선도 흥미롭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한국에 친구가 1명 생겼다는 것을 계기로, 일본을 다시 돌아보는 학생을 많이 보아왔다”고 썼다. 그의 말대로 진정한 양국의 이해란 사실 한국인이 한국을, 일본인이 일본을 돌아보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리라. 식민지 시대에 대한 저자의 조심스러우면서도 객관적이고자 한 서술은 이런 그의 생각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1930년 3월 10일 진해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을 다룬 대목이다. 일본 육군기념일이었던 그날 진해만 요새사령부에서는 영화감상회가 열렸다. 관객 대부분은 심상소학교에 다니던 어린 일본인 학생들이었는데, 영사를 담당하던 일본군이 서툰 조작으로 불을 냈고, 그 불로 영사실에 가득 차 있던 셀룰로이드 가스가 폭발했다. 영화를 보던 학생 107명이 불에 타 숨졌다. 이튿날 일본 본국 신문들이 1면 머리기사로 다뤘던 대형참사였다.

# 주차장 나무상자서 소녀 이름을 찾다

저자는 20여 년 전 진해의 한 일본 절집 터에서 비석의 기단으로 쓰인, 숨진 107명의 영혼을 기리는 ‘백칠령공양지탑(百七靈供養之塔)’을 발견했다. 기단에는 영화상영 화재사고로 사망한 아이 107명의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는데, 거기 딱 1명 한국인의 이름이 있었다. ‘박귀순(朴貴順).’ 그는 누구였을까. 저자는 당시 진해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로부터 당시 나이 12, 13세였던 박귀순이 ‘진해콩’으로 이름났던 진해의 과자점을 운영하던 일본인 가정에서 심부름하고 세 자녀 돌보는 일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불이 난 날도 과자점 주인의 8세 아이와 함께 6세, 4세 남매를 데리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화재사고 이틀 뒤 일본 본국의 오사카(大阪) 마이니치(每日)신문에 화재로 세 자녀를 한꺼번에 잃은 일본인 과자점 주인의 인터뷰가 실렸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발언이었다. “우리 아이 3명은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지만, 아이를 돌봐주러 갔다가 죽은 조선인 여성의 부모님께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그것이 더 힘듭니다.” 책이 박귀순에 대해 다룬 건 거기까지. 일본인 저자는 박귀순이 아니라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간 과자점의 일본인 가계를 쫓았다. 박귀순. 그는 왜 일본인 가정에서 일했고, 그의 죽음 이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의 행적이 저자의 몫이라면, 박귀순의 짧은 생애와 죽음을 위로하는 건 우리 몫이 아닐까.

진해에서 박귀순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박귀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공양탑의 행방마저 묘연했다. 수소문 끝에 겨우 진해구청 지하주차장 구석의 나무상자 안에서 해체된 탑을 찾아냈다. 탑이 서 있던 토지의 소유주가 건물을 신축하며 철거한 탑을 주차장 구석에 보관해뒀는데, 담당 공무원도 이 사실을 몰랐다. 나무상자 안의 탑은 박귀순 이름이 새겨진 부분이 깨져 ‘박(朴)’ 자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유일한 성과라면 박귀순의 부친으로 추정되는 이름 석 자를 알아낸 것이 전부였다. 박이식. 진해콩을 만들던 일본인 과자점에서 일했다니 주인집 아이들을 돌보다 13세 된 자기 딸이 죽은 셈이었다. 딸을 잃은 박이식은 그 뒤로도 과자점에서 일했을까. 박귀순에게 동생이나 언니가 있었을까. 기록도, 단서도 없다. 그저 비석에 깨진 이름으로만 남은 13세 조선인 소녀의 죽음이 애처롭다.

# 추억으로 호명되는 압축성장의 도시

이제 진해를 건너 마산으로 건너간다. 진해가 ‘식민지의 근대’라는 뼈대로 이뤄진 도시라면, 마산은 우리의 압축성장의 시기를 이끌었던 도시다. 성장의 시대에 맨 앞줄에 섰던 도시 마산. 그 시절 흥청거리던 마산을 주민들은 자랑스럽게 기억하겠지만, 외지인들에게 마산의 ‘좋았던 시절’이란 청춘을 돌아보는 안쓰러운 추억담에 가깝다.

주민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마산은, 적어도 외지인에게는 ‘회고의 도시’다. 마산의 영광과 추억은, 모두 과거에 있다. 다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대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다가 급격히 쇠락하면서 곳곳에 박제처럼 남은 자취가 마산에 있다. 미처 뒤를 돌아볼 여유 없이 지나쳐온 시간이 마산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마산은, 말하자면 ‘뒤를 돌아보기’에 딱 좋은 속도의 도시다. 너무 빠른 도시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추억을 되새길 시간이 없고, 속도가 느린 도시는 추억을 떠올릴 여유가 없다. 마산의 속도는 딱 그 중간쯤에 있다.

마산의 압축성장 시대 추억의 대부분은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울 명동이 부럽지 않았다는 원도심 ‘창동’ 골목에 있다. 1970년 마산이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된 이후 기업들이 앞다퉈 마산으로 내려오면서 한일합섬, 한국철강, 무학으로 대표되던 기업들이 번성했을 때의 이야기다.

6·25전쟁 당시 풀빵 장사로 시작해 1970년부터 198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다는 고려당 제과점도, 콘티넨털 다방 자리에 들어서 고려당과 쌍벽을 이뤘다던 코아 양과점도, 그 시절 ‘만남의 장소’ 역할을 했다는 서점 학문당도 여전히 창동 거리를 지키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개업해 3대째 자그마치 110년 역사를 지닌 복요리 전문 ‘남성식당’도, 상호를 프롤레타리아에서 따와 ‘프로식당’으로 내걸고 개업했다가 훗날 간판을 바꿔 달았다는 ‘불로식당’도 여전히 밥상을 차려내고 있다. 피란민처럼 손님이 몰려 ‘6·25’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는 떡볶이집이나, 40년째 팥죽 등 같은 메뉴를 내고 있다는 ‘복희집’, 음악인 조두남과 시인 구상, 미술가 최운 등 문화예술인들이 드나들며 술잔을 기울였다는 ‘만초집’도 성업 중이다.

# 3·15 의거에서 통술집 거리까지

근현대사의 중심도시 마산에 갔다면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우선 오동동의 3·15 의거 발원지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인양지는 지나쳐서는 안 될 곳이다. 3·15 의거 발원지는 민주화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한창 공사 중이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인양 지점인 마산 중앙부두에는 김주열 열사의 동상이 세워질 계획이다. 3·15 의거 당시 고교생이었던 김주열은 부정선거 항의 시위 도중 행방불명됐다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이곳에서 건져졌다.

긴 아케이드를 중심으로 해산물을 좌판에 펼친 어물전이 끝 간 데 없이 늘어선 마산어시장도 꼭 들러보자. 이른 새벽 상인들의 허연 입김으로 가득한 마산어시장 남성동 수협위판장에서는, 찬 바다에서 건져 올린 제철 생선들이 펄펄 뛰었다. 이른 새벽부터 불을 밝히는 어시장 좌판에는 뜨거운 삶의 모습이 있다.

더불어 마산을 찾은 여행자들의 소매를 끌어 권하고 싶은 곳이 있으니 ‘고향 바다’의 서정으로 가득한 마산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무학산 자락 아래 부엉산의 고운대다. 고운(孤雲)이란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신라 때의 문장가 최치원 이야기가 얽힌 곳이다. 고운대는 ‘학봉’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진 자그마한 산인데, 교방동 서원곡 유원지 쪽에서 오를 수 있다. 30분 남짓이면 고운대 정상에 닿는다.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마산 앞바다의 경관이 훌륭하다. 쪽빛 바다를 감싸고 있는 한낮의 마산 풍경도 좋지만, 불빛으로 가득한 화려한 마산의 야경은 ‘좋았던 시절’의 흥청거리는 마산을 떠올리게 한다.

그만한 스케일의 시선은 아니지만, 문신미술관이나 미술관 뒤편 추산근린공원에서 내려다보는 마산의 풍경도 모자람이 없다. 문신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동네 마을의 담과 벽을 동화책 속 그림으로 단장해 조성한 ‘가고파꼬부랑길’이 있으니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누추한 산동네와 골목이 동화책 속 그림으로 온기를 갖게 된 곳이다.

■ 진해탑 계단 숫자에 숨은 뜻

진해 도심의 야트막한 구릉인 제황산 정상에는 군항 도시 진해를 상징하는 진해탑이 있다. 우리 해군 함정의 모습을 본뜬 진해탑은 일제가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쓰시마해전을 축하하기 위해 세웠던 승전기념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었다. 진해탑으로 오르는 계단은 모두 75개. 37계단을 놓은 뒤 단차를 두어 다시 38계단을 두었다. 일제가 메이지(明治) ‘37년’과 ‘38년’ 사이에 벌어진 러·일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다.

창원=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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