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클래식] 전설의 프로듀서+살인범+코로나 희생자=?

김성현 기자 2021. 1. 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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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터의 1989년 당시 모습 /AP연합뉴스

오늘은 시네마도, 클래식도 아니라 일종의 ‘외전’입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팝 음반 프로듀서인 필 스펙터(1939~2021)가 얼마 전 8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사망 장소가 다소 의아했습니다. 병원이나 자택이 아니라 교도소였지요. 정확하게는 캘리포니아 교도소의 수감자 병원입니다.

딱 한마디로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비틀스의 프로듀서’입니다. 그는 비틀스의 마지막 공식 음반인 ‘렛 잇 비(Let It Be)’의 프로듀서였고, 그 뒤에도 존 레넌과 조지 해리슨의 독집 음반을 제작했지요. 존 레넌의 전설적 음반이자 노래 ‘이매진(Imagine)’의 공동 프로듀서였고,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 주연의 영화 ‘고스트’에서 흘렀던 라이처스 브러더스(Righteous Brothers)’의 감미로운 사랑 노래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 역시 그의 솜씨로 빚어낸 곡입니다.

비틀스의 '렛잇비(Let It Be)' 음반 표지

이 밖에도 레너드 코언(Leonard Cohen), 라몬스 등의 음반에도 참여했습니다. 그가 미국 빌보드 차트 ‘톱 10’에 올려 놓은 히트곡만 18곡에 이릅니다. 그래미상 수상은 물론이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했지요. 과히 팝 음악의 역사라고 부를 만합니다. 실제로 2004년 잡지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위대한 아티스트’의 63위에 오르기도 했지요. 이런 전설적인 프로듀서가 교도소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2003년 2월 3일 미국 캘리포니아 필 스펙터의 자택에서 여배우 라나 클라크슨이 머리에 총을 맞고 숨진 채로 발견됐습니다. 한국에서 클라크슨은 다소 낯설지만 1997년 영화 ‘바이스 걸스’ 등에 출연했다고 합니다. 스펙터는 5개월 뒤 잡지 인터뷰에서 그녀의 죽음이 “우연한 자살”이라고 주장했지만, 범행 직후 스펙터는 총기를 든 채로 운전사에게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2009년 스펙터는 19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고 말았지요.

스펙터는 프로듀서뿐 아니라 작곡가와 음반사 사장 등 다방면으로 활약했던 재주꾼입니다. 이미 19세에 ‘테디 베어스’라는 그룹의 보컬과 기타를 맡아서 ‘그를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될 거야(To Know Him is to Love Him)’로 처음 빌보드 1위를 차지했지요. 이 노래 제목에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스펙터 아버지의 묘비명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네요. 스펙터는 1961년에는 음반사를 공동 창업해서 불과 21세에 ‘사장님’이 되었습니다. 당시까지 팝 음악사상 최연소 ‘사장님’이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히트곡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입니다. 사실상 스펙터는 오늘날 ‘작곡가 겸 프로듀서’의 원조였지요.

팝 음악사에서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 건, 단지 히트곡이 많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프로듀서로서 ‘사운드의 벽(wall of sound)’이라는 독특한 방법론을 주창했지요.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어쿠스틱과 전자악기들을 동원한 뒤 반복 녹음을 통해서 깊고 풍성한 소리의 ‘벽’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사운드의 벽’이 적용된 초기 히트곡 가운데 하나가 로네츠(The Ronettes)의 1963년 발표곡 ‘썰매 타기(Sleigh Ride)’입니다. 3분 남짓에 불과한 이 곡에 각종 효과음부터 브라스와 코러스, 현악까지 소리의 층이 과연 몇 겹으로 쌓여 있는지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듣는 재미입니다.

이전까지 로큰롤은 공격적이지만 평면적인 사운드에 가까웠지요. 이 때문에 스펙터는 길거리의 음악이었던 로큰롤을 녹음 스튜디오로 끌어들인 주역으로 평가받습니다. 록을 예술의 반열로 끌어올렸다는 극찬을 받기도 하지요. 실제로 스펙터도 “로큰롤에 대한 바그너적인 접근, 아이들을 위한 작은 교향곡”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비틀스의 '벌거벗은 렛잇비(Let It Be... Naked)' 음반 표지

‘사운드의 벽’은 팝 음악의 일대 혁신으로 꼽히지만 모두가 경탄하거나 찬성했던 건 아닙니다. 실제로 비틀스의 경우에도 존 레넌과 조지 해리슨은 필 스펙터의 스타일을 좋아했지만, 반대로 폴 매카트니는 끔찍하게 여겼지요. 결국 매카트니는 2003년 필 스펙터의 사운드를 모두 걷어내고서 ‘벌거벗은 렛 잇 비(Let it Be… Naked)’라는 제목으로 다시 음반을 내기에 이릅니다. 무려 32년 만의 ‘역사 바로세우기’라고 할까요. 오케스트라와 코러스를 벗겨낸 ‘롱 앤드 와인딩 로드(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들어보면 매카트니가 얼마나 스펙터를 싫어했는지 대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풍성한 사운드가 모두 사라지고 나니 어쩐지 앙상하게 들린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네요.

가끔은 예술적 업적 때문에 인간적 실수나 범죄까지 미화하는 경우를 봅니다. 스펙터가 흥미로운 건, 첨예한 경계선에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술을 명분으로 범죄를 합리화할 수는 없겠지요. 오늘은 디스크자키(DJ)처럼 마지막 곡을 소개하고 마쳐야겠네요. 이번에는 필 스펙터가 24인조 오케스트라와 14명의 합창단까지 동원해서 잔뜩 사운드를 덧입힌 ‘롱 앤드 더 와인딩 로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쩐지 찐득하고 느끼한 이 버전에 더 정감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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