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측은지심 수퍼 히어로

이태훈 여론독자부 차장 입력 2021. 1. 28. 03:06 수정 2024. 1. 2. 16:3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 함께 아파하는 ‘한국형 수퍼 히어로' 劇 인기
보통사람들 고통 볼 눈 없다면, 드라마라도 보며 배우길
'경이로운 소문' /OCN

사방 벽도 바닥도 천장도 희게 빛나는 곳. 죽은 사람이 다음 세상 가기 전 잠시 머무는 연옥 같은 장소에서, 백발 노파가 말한다. “여기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아.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고. 다만 선한 사람은 반드시 보상을 받고, 악한 자는 반드시 응당한 대가를 치른다는 차이 정도?” 얼떨결에 악귀를 잡는 저승사자 ‘카운터’가 된 주인공 고등학생 ‘소문’은 노파의 말에 깜짝 놀란다. “그거, 엄청난 차이잖아요!”

우연히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을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는다. 엄청난 차이다. 지난 주말 최종회 통합 시청률이 11%를 넘었다. 한 글로벌 OTT의 동영상 랭킹 9위까지 올랐다. 이 인기의 답, 현실에는 없지만 극 속에는 있는 그 ‘차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수퍼맨이나 원더우먼 같은 서양 ‘수퍼 히어로’는 기상천외한 악당에 맞서 세계를 구한다. 하지만 ‘한국형’ 수퍼 히어로는 좀 다르다. 거대한 정의가 아니라 사소한 인과응보를 실현한다. 이웃의 억울함에 귀 기울이고, 착한 사람의 원한을 풀어준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수퍼 히어로다.

이 드라마 속 영웅은 빨간 운동복을 맞춰 입은 동네 식당 ‘언니네 국수’ 사람들이다. 평소엔 국숫집에서 국수를 말고 그릇을 나른다. 힘은 보통 사람 서너 배 정도. 버거운 악귀를 만나면 두들겨 맞고 피 흘리기 일쑤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싸움을 이어간다. 주인공 ‘소문’이 처음 숨겨진 제 능력을 발견하는 계기도, 나쁜 친구들에게 맞고 있는 착한 친구들을 구해낼 때다. 히어로 중 한 명인 국숫집 여인은 손찌검을 견디다 못해 남편을 죽이려는 동네 아줌마를 말리며 말한다. “나쁜 놈 잡자고 나쁜 짓 하지 말자, 애기 엄마. 우리가 한편 돼줄게.”

억울한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귀 기울여주고 한편이 돼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웹툰과 드라마가 그걸 먼저 알아차리고, 초인적 수퍼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이웃에게 ‘측은지심 수퍼 히어로’의 옷을 입혀 보통 사람들의 소망을 담아내고 있었던 거다. 죽은 영혼들의 슬픈 사연을 듣는 소녀를 신부로 맞았던 ‘도깨비’가 그랬고, 장난감 총과 칼을 휘두르는 ‘보건교사 안은영’이 그랬다.

‘측은지심’은 맹자와 제자 공손추의 대화에서 나온다. 맹자는 측은지심과 함께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羞惡之心]’ 등 네 가지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공손추와의 대화 바로 앞 편에는 스스로 정치 잘한다고 믿는 왕이 백성이 늘지 않는 이유를 맹자에게 묻는다. 맹자는 “몽둥이로 죽이는 것과 칼로 죽이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왕은 고개를 젓는다. 맹자는 한번 더 묻는다. “그럼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까?”

지도자라면 왜 사람들이 한국형 수퍼 히어로의 측은지심에 열광하는지 살펴야 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아파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영업자들의 피눈물, 눈 뜬 채 죽어가는 영화와 공연 종사자들의 비명이 보이고 들린다면, 차마 ‘방역은 너무 잘해서 물을 것이 없느냐’는 말은 못할 것이다.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에 내 집 마련 꿈이 짓밟힌 사람들이 ‘벼락 거지’ 불안감에 몰려 불타는 증시에 뛰어드는데, 그걸 경제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성과라고 자랑하지는 못할 것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이 있다면.

줄줄이 못난 지도자들 만나서도 견디고 버티며 성취해온 우리 국민이다. 더 나은 공감과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 마음 잘 모르겠으면, 드라마에서라도 배우길 바란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