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범의 문화탐색] 도덕의 굿즈화가 보여주는 것

2021. 1. 2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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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의 죽음과
위안부조차 굿즈화
문화적 냉소주의뿐일까
도덕 경쟁 사회의 맨얼굴
최범 디자인 평론가

입양된 한 아이의 죽음이 정초부터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짓누른다. 많은 사람들이 “○○아, 미안해”라며 해시태그를 달고 릴레이 애도를 한다. 연예인과 정치인들도 앞다투어 참여하고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맹자는 우물가의 아이를 예로 들어 성선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성악설이 성선설을 우물 속으로 밀어 넣는 세상을 목격하고 있다. 우물에 빠진 것은 아이가 아니라 성선설이었다.

이런 와중에 누군가는 “○○아, 미안해”라는 글귀를 넣은 물건을 만들어 온라인에서 팔고 있다. 몰염치한 상혼을 사람들이 비난하자 판매자는 서둘러 해당 쇼핑몰을 닫았다. 과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잔인한 농담인가, 아니면 농담 같은 현실인가. 비극마저 굿즈화 되어버린 시대, 이 ‘도덕의 굿즈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본 파인몰드사의 ‘정신대’라 이름 붙인 피규어 인형이 조선 여성의 모습을 본 뜬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지난 며칠 한국 사회를 시끄럽게 했습니다. 최초 프라모델 커뮤니티에서 한 네티즌이 가볍게 제기한 의혹을 연합뉴스 등의 언론이 재빠르게 소개하면서 게시판의 논란이 국가적 소동으로까지 확산된 것입니다. 네티즌들이 관련 기사와 게시물을 댓글로 달구었고 관련 단체인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는 일본 제조사에 항의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당 회사로부터의 확인과 여러 네티즌의 역사 고증으로 문제의 피규어가 1940년대 일본 여학생 모습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소동은 곧 잠잠해졌습니다.”(https://geodaran.com/12)

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하고 있는 소녀상 팔찌. [업체 홈페이지 캡처]

인터넷의 개인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이 글은 2007년에 일어난 하나의 소동을 전하고 있다. 일본의 한 모형 제작사가 내놓은 제품의 부속 아이템인 피규어를 둘러싸고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조선 여성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정대협은 정신대와 위안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다가 2018년에야 정의기억연대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는 성역이다. 정대협을 대표하던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고 위안부 피해자를 이용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지만, 위안부의 실체와 정대협의 활동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이를 어기면 누구든지 친일파와 토착왜구로 낙인찍혀 매장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몇몇 지식인이 이로 인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성역화가 낳은 결과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아, 미안해”와 마찬가지로 위안부도 굿즈로 소비된다는 사실이다. 전국 곳곳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져 있고 그 소녀상 이미지를 굿즈화 한 상품을 파는 인터넷 쇼핑몰이 버젓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위안부는 한쪽에서는 성역화, 다른 한쪽에서는 상업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며 우리는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영국의 미술 평론가 존 버거는 방글라데시 난민들의 비참함을 전하는 기사와 여성을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입욕제(入浴劑) 광고가 나란히 실린 신문 지면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한다. “두 가지의 대조적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게 아니라 이와 같은 대조적 상황을 동시에 묶어 보여줄 수 있는 우리의 문화적 냉소주의가 충격적이라는 말이다.”(『보는 방법들, Ways of Seeing』)

굿즈(goods)는 원래 일본의 오타쿠 문화에서 나온 것으로서 게임 잡지 등을 사면 끼워주는 물건을 가리킨다. 요즘은 패스트푸드도 굿즈 때문에 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마치 예전 어린이 잡지에 끼워 주던, 본책보다 더 기다려지던 별책부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어린아이의 죽음과 위안부를 굿즈화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를 존 버거의 말처럼 문화적 냉소주의로만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어쩌면 성역화와 상업화는 서로 공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성역이라는 이름의 상업화, 상업화된 성역.

일본의 한국학자 오구라 기조 교수는『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한국을 가리켜 도덕 경쟁을 벌이는 도덕주의 사회라고 지적한다. 도덕 경쟁은 사실 다른 형태의 인정투쟁이자 권력투쟁이다. 어떻게 보면 도덕을 투쟁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가장 타락한 형태의 투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어린아이의 죽음과 위안부조차 상품화해 팔아먹는 사회를 살고 있다. 이것이 도덕 경쟁을 벌이는 사회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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