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車 반도체 대란의 시사점
작년 2월 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으로부터 '와이어링 하네스'라는 자동차 부품의 수급이 끊기면서 현대·기아자동차를 비롯해 주요 완성차 업체들의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있었다. 그에 앞서 2019년에는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반발해 불화수소 등 수출을 제한하면서 국내 반도체 생산라인이 멈출 뻔한 아슬아슬한 상황도 일어났다.
이 같은 위기에서 한국이 내놓은 답은 '국산화'였다. 정부는 중국 등 해외에서 와이어링 하네스를 제조하는 국내 중소기업들의 리쇼어링(본국 회귀)을 작년 9월부터 추진 중이고, 반도체 소재 역시 국내 기업들이 발빠르게 대응한 덕에 일본 의존도를 상당 수준 낮췄다. 지난해 일본에서 들어오는 불화수소 수입액은 2019년과 비교해 74.2%나 급감했다.
이 와중에 또 한 번의 '국산화' 이슈가 터졌다. 자동차용 반도체 품귀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면서 주요 완성차 업체들이 생산을 중단하거나 공장 가동시간을 줄이고 있다고 한다. 원인은 코로나19도, 무역갈등도 아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위축했던 수요가 갑자기 폭발하면서 공급이 이를 맞추지 못하고 있어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자동차용 반도체 시장이 올해 187억7000만 달러에서 내년 210억 달러로 전년보다 12.5%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상황은 심각하다. 로이터에 따르면 지난 24일(현지시각) 독일의 피터 알트마이어 경제에너지부 장관은 대만의 왕메이화 외교부장에게 "차량용 칩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일본 정부도 최근 대만에 반도체 협조 요청을 했다.
다행히 현대·기아자동차 등 국내 업체들은 상대적으로 대응을 잘 해 아직까지 영향을 덜 받고 있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 국내 업체 역시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업계에서는 반도체수급의 이 같은 상황이 최소 6개월에서 최장 1년 이상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아마도 언제나 그렇듯 조만간 또 한 번 정부 차원에서의 국산화 바람이 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앞서 와이어링 하네스나 불화수소 등과 차량용 반도체는 차원이 다르다. 차량용 반도체는 대부분 시스템(아날로그) 반도체에 해당하는데, 다품종 소량생산 구조에 안전을 중시하는 자동차의 엄격한 생산 특성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특화된 업체들이 많다.
실제로 차량용 반도체 설계업체의 매출 순위를 보면 세계 반도체 톱10과 완전 다른 양상이다. TI(텍사스인스투르먼트)와 마이크론만 차량용 반도체와 전체 반도체 매출 톱10에 동시에 이름을 올리고 있을 뿐 나머지는 대부분 자동차에 특화된 업체들이다.
세계 반도체 1위인 인텔도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는 29위에 불과하며, 2위인 삼성전자도 차량용 시장에서는 24위에 머물고 있을 만큼 존재감이 약하다. 사실 이들 업체들은 못한다기보단 안했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수 있다. 이유는 차량용 반도체는 수량도 적고 보수적인 완성차 업체들의 성향상 진입장벽이 높아서다. 다수의 반도체 업체들은 지금까지 차량용 반도체를 소위 '계륵'처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계륵이 갑자기 황금알로 부상하고 있다. 코트라에 따르면 현재 판매 중인 일반 자동차에 탑재되는 반도체 수는 200~300개 수준이지만, 향후 운전자가 핸들을 잡을 필요가 없는 레벨3 자율주행 시대가 본격화 되면 2000개 이상의 반도체가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가 하만을 인수하고 현대자동차가 반도체 설계 계열사를 만든 것 역시 이 같은 가능성에 주목해서다. 문제는 두 회사 모두 시선은 국내가 아닌 해외로 향해 있는 점이다. 내수 시장의 한계가 너무 명확하고,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도 부실하기 때문이다. 상당한 자율주행이 가능한 테슬라 모델S를 사도 국내에서는 핸들에서 손을 떼면 불법이고, 도로 환경도 들쑥날쑥해 운전자가 위험해 질 수 있다. 자율주행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을 위한 논의도 미국 등 주요 국가에 비해 부족하다.
서로 생각과 이해관계가 너무 다른 완성차 업계와 반도체 업계 간 교감을 이끌 만한 장도 없다. 세계 2위 반도체 업체와 세계 5위 완성차 업체가 한 나라에 있는데도 각자 따로 움직이니 성과가 좋을 리 없다. 완성차는 최고 품질의 반도체를 원하고, 반도체 업체들은 IT제품 못잖은 수익성을 원한다. 기술적인 문제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그렇다면 공은 정부로 넘어간다. 모처럼 시스템반도체 육성 계획을 내놓은 정부가 차량용 반도체까지 영역을 확장해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미래 시장 발전을 고민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고, 이를 가로막는 규제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길을 뚫어준다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comja7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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