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방송국 아랫것들의 예의 (상) / 이보라
어머니는 딸내미가 방송국에서 일한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했지만, 그럴 때마다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방송 제작에 참여하는 임시 인력일 뿐이었다.
이보라(가명)ㅣ방송작가
“아랫것들은 아래에서 먹으면 되겠네요.”
4개월 남짓 함께 일하던 피디가 나와 조연출에게 건넨 말이다. 말이 나온 이유는 이러했다. 출연자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는데,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제작팀 2~3명이 따로 앉아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피디는 ‘출연자와 나는 여기에서 식사할 테니 조연출과 막내 작가는 따로 먹자’고 말하지 않았다. “아랫것들은…”이라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귀를 의심했다. 조연출도 황당하다는 듯 서로 얼굴을 응시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당황스러움은 창피함으로 변해갔다. 출연자도 분명 그 말을 들었으리라.
나는 방송작가다. 제작팀 안에서는 ‘막내’ 작가였지만, 출연자에겐 ‘취재’ 작가였다. 이틀에 한번 출연자와 통화하며 그의 상태를 살피고, 특이사항을 확인하는 일을 했다. 그런 출연자 앞에서 나는 졸지에 ‘아랫것’이 되었다.폐부를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아랫것’이라는 단어는 나의 처지를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화가 났다. 사과받고 싶었지만 사과할 피디가 아니었다. 악의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날 이후, 직업으로서의 방송작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프리랜서로 죽도록 일하는 일개미인데 노동자는 아니었다. 무료 노동법률사무소에 연락했다. 일하다 언어폭력을 당했는데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구제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민사 소송을 해야 한다는 답을 받았다. 그렇다. 방송작가는 일하다 다쳐도, 언어폭력을 당해도, 성희롱을 당해도, 부당해고를 당해도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건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는 분명 노동을 하고 있었다. 임금이 아닌 원고료를 받았지만, 월급 형태로 매월 10일에 입금이 됐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밤 10~11시에 퇴근했다.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아이템 발제부터 자료조사, 출연자 섭외를 도맡았다. 피디와 메인 작가에게 보여줄 수십가지 대안을 만드는 건 막내 작가인 나의 몫이었다.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에도 나갔다. 그곳에서 출연자 상태를 점검했고, 때에 따라서는 출연자 가족도 돌봐야 했다. 촬영이 끝나면 촬영된 테이프를 영상과 현장음으로 나눠 문서화시키는 ‘프리뷰’ 작업을 해야 했다. 전문 프리뷰어를 고용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내가 다니던 제작사에선 제작비를 아끼려 프리뷰를 모두 내게 맡겼다.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사람을 더 뽑아 달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 순간, 헌신짝처럼 버려질 수 있는 게 프리랜서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촬영 현장에서 브이제이(VJ. 비디오 저널리스트) 감독의 일당에 대해 들었다. 그는 “요새 다른 프로그램은 하루 50만원은 주는데 이 프로그램은 40만원밖에 안 준다”며 내게 하소연을 했다. 40만원이라니. 그 돈은 당시 내가 다큐멘터리를 한편 만드는 데 받는 한달 원고료였다. 다행히 3부작짜리 프로그램이라 한달에 12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브이제이 감독은 하루 일하고 40만원을 받았다. 프로그램 기여도는 내가 훨씬 높았다. 그런데 그가 하루 일하고 받는 돈과 내가 한달 일하고 받는 돈이 같았다. ‘자괴감’은 이럴 때 쓰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프로그램 제작을 마치고 시피(CP. 책임 프로듀서)와의 회식 자리가 마련됐다.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물었다. “방송 만드는 데 작가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에 비해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다. 그래서 못 버티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작가도 정규직으로 뽑으면 제작 안정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는 반말로 대답했다. “작가는 태생부터가 프리랜서야. 싫으면 다른 일 해.” 그곳에서 해를 보며 퇴근한 날이 없었다. 매일 야근을 했지만, 저녁 식대나 야근수당은 없었다. 휴일근무 수당도 받지 못했다. 그뿐인가. 1년 넘게 일해도 퇴직금은 없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서러움이라는 게 폭발한다. 정규직에겐 한 보따리 쥐어지는 그 흔한 선물세트가 내 손엔 10년 동안 단 한번 쥐어진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딸내미가 방송국에서 일한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했지만, 그럴 때마다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방송 제작에 참여하는 임시 인력일 뿐이었다.
지난 10년간 나는 ‘일개미 중 일개미’였고, 건강이 안 좋을 땐 연차를 쓰거나 병가를 내는 게 아닌 중도하차를 해야만 했다. 노동자들이라면 당연한 연차휴가가 내겐 그림의 떡이었다. 한명이 두명분의 일을 해야 하는 업계 특성상, 내가 하루라도 빠지면 동료들이 힘들어질 게 뻔했다. 그래서 아프면 알아서 빠져주는 게 이 바닥의 예의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지난해 주최한 ‘10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입니다. 하편은 다음주에 실립니다. 수상작 일부를 해마다 <한겨레>에 게재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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