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설부터 서계동 시대까지.. 검열로 얼룩진 국립극단의 70년사

박성준 2021. 1. 27. 13: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립극단 70년의 自省 ②
독일 문호 실러 서거 200주기 기념 대규모 공연. 국제 쉴러 페스티벌 폐막작으로 독일 만하임에서도 공연.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자료
“국립극단 70년을 서술하는 동안 가장 마음이 아팠던 점은 최근의 ‘블랙리스트 사태’가 맥락 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국립극단 70년은 애초부터 정부 산하 단체로서 검열이 지배하는 역사였고, 그 정점으로 드러난 것이 블랙리스트 사태였을 뿐이다. 2013년 가을 국립극단의 ‘개구리’공연으로부터 블랙리스트 사태가 촉발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국립극단 70년 역사를 반성적으로 회고하며 이제 기필코 이루어야 할 일은 국립극단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국립극단 이사진과 국립극단 예술 감독을 문체부 장관이 임 명하는 구조부터 바뀌어야 한다.” -국립극단 70+ 아카이빙-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값진 건 그만큼 드문 일이어서다. 그런데 국립극단이 최근 펴낸 70년사 ‘국립극단 70+ 아카이빙’은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연극 평론가 8인으로 70년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국립극단의 어제와 오늘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결과다. 3년에 걸쳐 작업을 진행한 이들은 ‘어느 시기 무슨 공연이 있었다’식의 연대기가 아니라 중요한 변곡점을 짚어내고 그 안에서 국립극단 성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심층적으로 들여다봤다. 편집자 주
 
◆검열로 얼룩진 70년

국립극단 70년사는 국립극단 역사를 총 6개 시기로 구분한다.

①국립극장 창설로부터 전쟁을 거치며 시공관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모색기(1950 ~1961)

②시공관을 국립극장으로 전격 사용하면서 전속 극단이 창단된 이후의 정착기(1962~1972)

③장충동으로 국립극장이 이전하면서 정부 시책에 더욱 종속되었던 국책 연극기 (1973 ~1980)

④공무원들이 국립극장장을 맡다가 민간 극장장이 임명된 이후(1981~1999)

⑤국립극장이 책임운영기관으로 전환되고 국립극단에 예술 감독제가 도입된 이후(2000~2009)

⑥재단법인화 이후 서계동 시대(2010~2019)
이러한 70년 역사에서 현재 국립극단 모습으로 고정된 건 2010년 법인화에 이어 2015년 전속단원을 해산하고 시즌 단원제를 시행하면서다. 민주화가 성숙하고 문화 저변도 넓어진 시대였지만 재단법인화 이후 국립극단 활동에 대한 평가 역시 최근까지 그리 후하지 않았다. 극장이 3개나 되면서 공연 물량은 많아졌는데 대부분 공연의 완성도가 떨어졌고, 외국작품·외국인 연출이 너무 많으며 우수한 신작이 없고, 젊은 작가나 연출을 기용한 공연이 절대 부족하다는 비판을 수년전까지 받았다.

“재단 법인화 이후만 보더라도 ‘삼국유사 프로젝트’부터 ‘한민족 디아스포라전’까지 다섯 차례의 야심 찬 기획시리즈를 통해 총 26편 신작을 생산했는데 이 중 재공연된 경우는 지금까지 겨우 한 작품이다. 한 번 공연한 작품들을 그냥 버릴 것이 아니라 레퍼토리화가 가능한 작품들을 선별하여 꾸준히 갈고 다듬어야 한다.” -김미도·앞으로 써야 할 역사를 위하여-

특히 박근형 연출의 ‘개구리’가 검열받으면서 촉발된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사태는 국립극단이 정권의 검열 하수인 역할을 거부하지 못한 오욕을 남겼다. 70년사 편찬위는 “블랙리스트 실행기관으로까지 전락했던 국립극단 행태는 국립극단 70년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독일 연출 디터 기징 공연으로 역대 최다 관객 모은 화제작. 국립합창단·무용수 출연 및 18대의 비디오와 음량에 따라 밝기 변하는 수은등으로 파격적 무대 구현.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자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립극단은 두 차례나 연극계와 피해자들에게 사과했지만 외풍에 약한 모습은 그대로다. 근대 연극을 재조명하자는 취지에서 무대에 올리려던 친일극을 논란이 예상되자 연출과 상의도 없이 성급하게 취소하는 등 창작의 자유를 지키려는 모습을 좀처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노이정 연극평론가는 “더 높은 표현의 자유에 도달하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연극인들과 공식적으로 소통의 장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며 “블랙리스트 적용을 실행한 국립극단이 그 기억을 회피하려고 하면 그 기억은 히스테리화해 장기적으로 침잠될 우려가 크다. 70년의 역사를 맞도록 정치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해왔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고 비판했다.

◆블랙리스트 피해자가 새 예술감독

연출가 김광보는 박근혜 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서 ‘좌성향’으로 분류돼 2015년 국립극단 낭독공연 연출이 취소됐던 피해자다. 그런 그가 지난해 11월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됐다. 취임 100일을 맞아 지난 18일 열린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김광보 예술감독은 3년 임기 중 추진할 사업으로 가장 먼저 블랙리스트 사례집을 만들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 예술감독은 “국립극단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예술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서 새롭게 거듭나는 국립극단의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먼저 무엇을 빨리 바꾸고, 신속하게 사건을 종결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진정으로 변화된 국립극단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러기 위해서 블랙리스트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사회적 기억을 위해서 사례집을 만들겠다. 이것은 그냥 책 한권이 아니고 블랙리스트 피해자의 목소리”라고 설명했다.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국립극단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김광보 국립극단 신임 예술감독. 국립극단 제공
김 예술감독은 국립극단을 권력 외압으로부터 지켜낼 방안도 제시했다. 현장소통자문위원회, 작품추천자문위원회, 공연평가위원회 운영이다. 연극 현장과 소통을 강화한다는 취지이나 그만큼 국립극단을 부조리한 외풍으로부터 막아내는 장치도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현장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국립극단에 바라는 점을 수용하고, 무대에 올릴 작품도 연극계 중론을 반영할 방침이다.

국립극단이 추구해야할 가치로 ‘누구나 평등하게 향유해야 한다’와 ‘오늘의 새로운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를 꼽은 김 예술감독은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국립극단은 우리 연극인들이 물리적으로 그리고 또 심리적으로 보다 안전하고 창의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예술을 한다는 행위는 어쩌면 그 예술가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극대화시켜서 그것을 보편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에게 누구나 자유롭게 예술 행위를 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강화하고, 예술가의 권리를 보호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예술가의 성장 토양을 마련하겠습니다.”

스스로가 블랙리스트 피해자이면서도 이날 “다시 한 번 국립극단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으신 예술가분들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드린다”고 고개를 조아린 그는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변화해 갈 때 우리가 당면해왔던 많은 사건들에 대해서 반성하고 사과하고 개선시켜 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고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이 저지른 일은 인간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