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영원한 KCC맨이 되고픈 남자, 강은식 KCC 서울영업소 건재유통영업팀 과장

손동환 2021. 1. 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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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인터뷰는 2020년 11월에 진행되었으며,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0년 12월호에 게재됐습니다. (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이유 없이 그리운 사람이 있다.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농구 팬들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특히, 현장에서 보기 힘든 농구인들은 팬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일 수 있다.

강은식 역시 마찬가지다. 2014년 은퇴한 후, 6년 동안 농구 현장을 떠났다. 누군가에게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이 됐다.

강은식은 비록 농구 현장을 떠났지만, 제2의 인생을 보람차게 보내고 있다. 현장을 떠난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와 함께 한 인터뷰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강은식, 그는 어떤 선수였나?

강은식은 2005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9순위로 전주 KCC에 입단했다. 백업 빅맨이었던 강은식은 골밑 수비와 리바운드 등 궂은 일을 착실히 했다. 파이팅 넘치고 근성 있는 플레이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8~2009 시즌 추승균(전 KCC 감독)-하승진(은퇴)-강병현(창원 LG) 등을 도와 팀의 우승을 도왔다. 2010~2011 시즌에도 팀의 챔피언 결정전 진출을 도왔다. 하지만 챔피언 결정전 3차전에서 불의의 부상을 입었다. 수술을 기다렸고, 병원에서 팀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부상 여파로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다. 2013년 2군 드래프트로 KCC의 부름을 받았지만, 부상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다. 아쉬움 속에 선수 생활을 마쳤다.

신인 드래프트 때 방성윤과 김효범 등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럼에도 전체 9순위로 지명을 받으셨는데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앞 순위에서 생각지 못했던 선수들이 선발됐어요. 제가 예상했던 순번보다 3~4개씩 밀린 것 같아요. 6순위가 이후에는 1라운드 지명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다행히 KCC에서 뽑아줘서 기뻤어요. 너무 감사했죠.(웃음) 

2008~09 우승의 숨은 주역이었습니다. 본인한테는 첫 우승이었고요. 기쁨이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오래 전 일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웃음) 좀 얼떨떨했던 것 같고, 우승을 도왔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 같아요. 팀 우승에 보탬이 됐다는 자부심도 있는 것 같고요.(웃음)
KCC는 2010~2011 시즌도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챔피언 결정전 3차전 때 전방십자인대와 연골을 동시에 다쳤습니다.
다치고 나서 입원해있었어요. 승부가 결정됐던 6차전에 가고 싶었는데, 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갈 수도 있었지만, 팀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면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했죠. 그냥 순리대로 안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제가 안 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슈가 됐던 것 같아요.(웃음) 팀에서 제 유니폼을 벤치에 걸어뒀고, (하)승진이가 우승 후에 제 유니폼을 입고 세레머니를 했죠.
승진이한테 너무 고마웠어요. 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승진이가 인터뷰 때도 제 이야기를 해줬거든요. 저는 비록 병원에 있었지만, 승진이 때문에 영웅이 됐죠.(웃음)
2013년에 2군 드래프트로 복귀를 노렸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은퇴를 했습니다.
마지막에 코트를 꼭 밟고 은퇴하고 싶었어요. KCC가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저에게 기회를 줬어요. 저는 저를 뽑아준 KCC에 보답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운동할 수 있는 무릎 상태가 아니었어요. 전혀 낫지 않았어요. 그 때 내려놔야 되겠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걷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기본적인 뜀박질도 못하거든요.

KCC 농구 선수 강은식 -> KCC 서울영업소 건재유통영업팀 과장 강은식
강은식은 2014년 선수 생활을 마쳤다. 막막함이 있었다. 그러나 KCC가 강은식에게 손을 내밀었다. 본사에 있는 서울영업소의 건재유통영업팀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전혀 접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강은식은 이를 받아들였다. 선수 시절에 보여준 끈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공부했고, 새로운 것을 공부하면서 또 다른 배움을 얻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은퇴 직후부터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너무 감사하게도, 정상영 명예회장님을 비롯한 회사 관계자 분들께서 저한테 KCC 본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어요. ‘KCC의 이름을 달고 뛰다가 다친 건데, 우리가 품어줘야 ㅎ한다’고 하셨죠. 그래서 은퇴한 해 6월(2014년 6월)부터 KCC 본사에서 일했죠.
어떤 일을 하셨나요?
쉽게 말씀 드리면, 저희 건축 자재를 대리점이나 건설사에 파는 영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건물을 짓기 위해 필요한 내장재가 있는데, 그걸 필요로 하는 업체에 판매하는 일이죠.
선수 시절과는 너무 다른 일입니다. 막막함도 있었을 것 같아요.
솔직히 두려움이 컸어요. 제가 회사를 다녀본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을 해본 것도 아니었죠. 어쨌든 먹고 살 걸 생각해야 하니까, 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생소한 건축 자재를 공부하는 것부터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교육을 다 같이 받고, 책도 받고 공장도 견학했어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건축을 전공했던 친구들보다 지식이 떨어졌죠. 용어를 익히는 것부터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거기다가 영업을 하셔야 합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도 분명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솔직히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영업이 제가 만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잖아요. 제가 만나는 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판매 방향을 설정할 수 있고요. 그런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게 지금도 제일 힘들어요.
이전과 다른 생소한 경험을 했습니다. 배운 것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인맥이 넓어졌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많이 배웠죠. 그리고 ‘너가 이 일을 계속 하려고 하면, 이런 식으로 해야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윗 분들의 조언도 많이 들었고요.
농구를 했던 게 도움이 될 때가 있나요?
간혹 만나는 분들 중에 농구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 분들이 저를 알아볼 때가 있으세요. 아무래도 농구를 좋아하는 분들과는 이야기할 수 있는 여건이 쉽게 조성됩니다. 거리감도 줄일 수 있고요.
또, 그 분들은 저의 선수 시절에 관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세요. 선수 시절에 했던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기억하시더라고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분들이 제가 모르는 걸 더 친절히 알려주시고, 여러 도움도 주셨어요.
KCC는 은퇴한 선수들을 잘 챙겨주는 팀입니다. KCC에 있었던 게 분명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저한테는 KCC에 입단했던 게 행운이었어요.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셨고요. 감사한 마음이 정말 커요.
농구 : 강은식의 인생에서 뗄 수 없는 단어
강은식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유니폼보다 정장이 어울리고, 농구공보다 수첩이 어울리는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구’는 강은식에게 뗄 수 없는 단어였다. ‘농구’만큼 강은식에게 소중한 단어도 없었다. ‘농구’가 없었다면, 지금의 강은식도 과거의 강은식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농구를 보고 있으신가요?
은퇴 후 1-2년 동안은 농구를 안 봤어요. 제가 실력이 부족해서 그만뒀으면 상관없는데, 다쳐서 그만 둔 거라 미련이 남았죠. 그래서 안 봤던 것 같아요.
그런데 계속 안 볼 수는 없었어요. 저한테 ‘올해는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으시고(웃음), 저한테 농구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도 많으세요.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은 챙겨보고 있어요.
현장이 그립지는 않으세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웃음) 제가 코트에 있었으면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미련도 아직 남았고요. 사실 은퇴 선수라면 그런 미련은 다 가질 거에요.
지도자 생각도 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은퇴하고 나서, 지도자를 생각하기도 했어요. 유소년 농구 교실도 생각했죠. 그러던 찰나에, 회사에서 저에게 기회를 줬어요. 제가 회사에 들어가면서 회사 일에 올인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회사 일을 끝까지 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본인은 어떤 농구 선수였다고 생각하세요?
음… 어떤 선수였다는 생각보다, 코트에 나가서 몸을 사리지 않고 파이팅 있게 했다는 이미지로 남고 싶어요. 그런 마음이 커요.
농구는 본인에게 여전히 소중한 의미겠죠?
어쨌든 ‘농구’를 했기 때문에, 지금의 인생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농구’라는 두 글자는 제 인생에서 뗄 수 없는 것 같아요. 평생 갖고 가야 할 단어죠.
후배 선수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코트에 있을 때 절실히 했으면 좋겠어요. 후회 없이 했으면 좋겠고, 다른 요소들을 탓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하고 나오면 좋겠어요. 선수 생활을 마치고 나니, 그런 게 계속 마음에 남더라고요.
그리고 농구 외에도 영어나 기본적인 것들을 스스로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향후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사회 생활을 대비해서, 공부를 미리 해뒀으면 해요. 선수 생활을 마치고 나서 하면 늦더라고요.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팬들의 응원이 있어서 제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응원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KCC를 사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거듭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사진 = KBL 제공, 손동환 기자
바스켓코리아 / 손동환 기자 sdh2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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