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계' 서왕모와 '인간계' 주목왕의 잔칫상..50년만에 환수된 '요지경' 속 만남

이기환 선임기자 2021. 1. 2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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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국에서 구입환수되어 돌아온 ‘요지연도’. 기원전 10세기 중국 고대 전설 속 인물인 서왕모(西王母)가 신선들의 땅인 곤륜산(崑崙山)의 연못인 요지(瑤池)에 주나라 목왕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푸는 모습을 그린 신선도이다. 가로길이가 5m에 이르는 대작 병풍이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 후기 궁중을 중심으로 유행한 그림이 있다. 기원전 10세기 중국 고대 전설 속 인물인 서왕모(西王母)가 신선들의 땅인 곤륜산(崑崙山)의 연못인 요지(瑤池)에 주나라 목왕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푸는 모습을 그린 신선도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뭐 소중화라는 자부심마저 갖고 있던 강력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특히 궁중에서 무슨 신선도라는 말인가.

불로장생의 도교적 주제를 담은 이 신선도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겪은 조선 후기의 상황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있다. 즉 불사약을 지닌 서왕모는 백성들이 꿈꿔온 낙원을 실현시켜 줄 구세주로 추앙받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임금인 숙종(재위 1674~1720)은 궁중에서 그린 ‘요지연도’에 “요지에서 연회 열리니 신관이 몰려오고(瑤池設宴會神官)…전각 안 서왕모는 구룡관(殿中王母九龍冠)…늙지 않는 반도는 옥쟁반에 가득(不老蟠桃滿玉盤)…”(<열성어제> ‘숙종 제요지대회도’)이라는 시까지 남겼을까.

‘요지연도’ 공통된 특징은 서왕모와 목왕 앞자리에 잔치상이 놓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번에 구입환수된 ‘요지연도’에는 잔칫상 대신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시녀들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19세기 궁중회화의 진가를 고스란히 담았다는 ‘요지연도’를 포함한 병풍 3점을 ‘궁중서화실’에서 전시중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요지연도’는 미국의 개인이 소장하던 작품이었다. 소장가의 부친이 50여 년 전 주한 미군으로 근무할 당시 구입하여 미국에 가져갔던 것이다. 지난해 문화재청이 국내 한 경매사를 통해 다시 구입한 뒤 국립고궁박물관에 이관했다. 이 ‘요지연도’ 병풍은 가로 넓이가 무려 5m에 이른다.

‘요지연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인가. 천태만상이라는 뜻의 ‘요지경’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의 요지가 바로 신선들의 땅이라는 중국 곤륜산 정상에 있었다는 연못이다. 도교에서 가장 오래된 여신인 서왕모는 바로 이 곤륜산에 살고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에서는 서왕모를 반인반수의 존재로 묘사했다. 그런데 기원후 3세기 무렵부터는 주 목왕과의 에피소드 등을 통해 인간의 신으로 탈바꿈했다. 급기야는 불로장생의 약을 주는 여신으로 탈바꿈한다.

근대기에 제작된 12화폭 신선도. 화폭마다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길상적인 의미를 지닌 신선들이 묘사되어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주 목왕은 서주(기원전 1043~771년)의 5대 임금(재위 기원전 977?~922?)이다. 55년의 재위 기간 중 견융과 서융 등 오랑캐들을 무찌르고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로 알려져있다. 주 목왕은 나라가 평안해지자 천하를 순행했다. 서왕모-주 목왕의 에피소드는 이 순행 과정에서 탄생한다.

사실과 신화가 혼합된 일화는 서진 시기(기원후 265~316)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목왕의 전기소설(<목천자전>)에 자세히 등장한다. 즉 기원전 10세기 음력 3월3일 어느 날 서왕모는 팔준마를 타고 서쪽을 순행하던 주 목왕을 요지에서 개최한 연회에 초대했다. 이날의 연회는 서왕모의 생일잔치였다. 목왕은 초대장을 받은 유일한 인간이었지만 서왕모의 곁에 앉는 영예를 누린다.

이때의 연회를 그린 ‘요지연도’를 비롯, 서왕모 관련 그림들은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면서 전해졌다. 서왕모가 주목왕에게 3000년만에 한번씩 열매가 열린다는 선경(仙境)의 복숭아(반도)를 선물했다. 인간이 이 복숭아를 먹으면 1만8000년을 산다고 했다. 서왕모가 주목왕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서왕모=불로장생의 약을 주는 여신’으로 탈바꿈하는 에피소드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이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처음으로 공개하는 ‘요지연도’는 여러 ‘요지연도’ 중에서도 비교적 고식(古式)에 속하는 것이다. 요지연도의 공통된 특징은 서왕모와 목왕 앞자리에 잔치상이 놓인다는 점이다. 곽희원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그런데 이번에 공개되는 ‘요지연도’는 잔칫상 대신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시녀들을 배치해 연회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 것이 특색있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에는 근대기에 제작된 ‘신선도’ 12폭 병풍을 함께 전시하여 관람객들이 조선후기 궁중 신선도의 시기적 변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10폭 병풍인‘수군조련도’. 19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경상도 통영에서 행한 삼도(三道)의 수군 훈련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화폭마다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길상적인 의미를 지닌 신선들이 묘사되어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신선도는 궁중과 민간에서 복을 기원하고 무병장수의 소망을 담은 장식화로 꾸준히 유행했다. 김현정 학예연구관은 “먹의 번짐 효과를 극대화한 화법으로 그린 근대기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도교 신선이나 불교 관련 인물화)의 특징을 보인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 왕실 군사력의 상징, 군사의례’ 특별전에서 미처 선보이지 못한 ‘수군조련도’도 같이 전시되어 있다. 19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경상도 통영에서 행한 삼도(三道)의 수군 훈련 장면을 그린 10폭 병풍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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