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문화, 반도체·車 성공 바탕됐지만 연공서열제·불평등 부작용 낳았다"

나윤석 기자 2021. 1. 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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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쌀, 재난, 국가’를 출간한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가 26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 책에서 동아시아 ‘쌀 문화 유산’의 긍정적·부정적 유산을 동시에 살핀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 ‘불평등의 세대’ 쓴 이철승, 후속작 ‘쌀, 재난, 국가’ 출간

공동체 협력·조율 강조해

K-방역 등 성과 이끌어내

“가뭄·홍수 관리만 잘하면된다”

선별적 재해대비, 불평등 야기

개인화된 재난 겪는 21세기

‘보편적위험 대비’ 국가로 가야

“땅과 자산 등 ‘사적 상속’에 대한 집착, 한 번의 시험 통과로 평생 정규직을 보장받는 ‘연공제’는 동아시아 쌀 문화권의 유산입니다.”

청년 세대를 불행으로 내몬 386 세대의 권력 독점을 비판한 ‘불평등의 세대’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가 26일 ‘쌀, 재난, 국가’(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불평등 3부작’ 가운데 2부에 해당하는 책으로 전작이 세대 불평등을 초래한 연공제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책은 연공제를 포함해 한국사회의 불평등 기원을 동아시아의 ‘쌀 문화 유산’에서 찾는다. 이 교수는 ‘밥(쌀)’에 기반한 문화 양식이 협업 구조 등 동아시아 경제발전을 이끈 원동력이 되기도 했으나 ‘빵(밀) 문화권’보다 불평등 해소에 소극적이라며 그 메커니즘을 쌀-재난-국가라는 3가지 키워드에 대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이 교수는 26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3가지 키워드의 작동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동아시아에서 주식인 쌀은 밀보다 훨씬 많은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서구에 비해 태풍·가뭄·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유난히 문제가 됐습니다. 재해 대응의 중요성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힘에 바탕을 둔 ‘재난 대비 구휼 국가’ 성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교수는 이 같은 역사적 기원 덕분에 한국·대만·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등 수천 년 동안 벼농사 체제를 발전시켜 온 국가들은 최상급의 ‘공동체 조율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K-방역’ ‘방탄소년단(BTS)의 성공’ 역시 이 같은 전통에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또 ‘쌀 문화권’의 ‘협력과 경쟁 DNA’는 반도체·자동차 등 기업 조직에 이식돼 동아시아의 빠른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고 진단했다.

문제는 ‘밥을 먹는 자들’이 ‘빵을 먹는 자들’보다 재분배 등 불평등 치유에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이 교수는 우선 재난 대비 국가의 기본 운영원리인 ‘선별적 구제 시스템’을 거론했다. “재난 대비 국가는 역할을 ‘위험에 노출된 마을 구제’에 한정했습니다. ‘평시엔 물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목표 아래 재난 시기에 효율적 극복을 주도하는 관리 이상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이죠. 병들거나 다친 자는 가족과 씨족이 책임졌고요. 국가가 담당해야 할 ‘복지’를 개인이 떠안았던 것입니다.”

또 동아시아 농민들이 제한된 땅에서 새로운 땅을 개간하는 경쟁은 오늘날 부동산을 통한 ‘건물 확보 경쟁’과 비슷하다. 그는 “벼농사 체제에서 발흥한 동아시아의 개발국가들은 부동산이라는 사적 자산을 확보하도록 부추김으로써 복지 안전망 구축이라는 의무를 방기했다”며 “반면 서구 밀 문화권은 ‘노는 땅’을 공유지로 활용하는 목축업이 발달하면서 사적 소유에 대한 욕구가 상대적으로 완화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언뜻 벼농사와 무관해 보이는 과거제 역시 ‘불평등의 기원’이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벼농사는 ‘누가 더 많이 수확하느냐’의 게임인데, 옆집 아들이 과거에 급제해 토지를 하사받는 순간 ‘대박 분양권을 손에 쥔 게임 체인저’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평범한 자식은 농사에 투입하고, 똑똑한 자녀는 서원에 보내는 ‘이중 포트폴리오’를 짜는 것이죠. 한 번의 시험으로 신분을 보장받는 과거제는 정규직이 되면 ‘직무’와 ‘숙련도’에 상관없이 연차에 따라 임금을 받는 호봉제와 유사한 구조를 지닙니다.”

이에 이 교수는 “뿌리 깊은 쌀 문화구조를 개혁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21세기 시민은 청년 실업, 비정규직 등 온갖 ‘개인화된 재난’에 시달리는데 국가만 재난 대비 시스템으로 남아선 안 됩니다. ‘재난 대응’이 아니라 ‘보편적 위험’에 대비하는 복지 안전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효율적 협업 시스템’ 같은 벼농사 체제의 긍정적 유산은 보존하되 여성 인력을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위계 구조의 핵심인 연공제는 장롱 속으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 교수는 “이 같은 분석이 ‘벼농사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면서도 “이미 수없이 알려진 요인이 아니라 잘 얘기되지 않은 요인을 강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3부작 완결편에 대해선 “노동이 쉽게 자본이 되는 ‘창업 생태계’를 다룬 책을 구상 중”이라며 “가제는 ‘불평등의 극복’”이라고 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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