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폭스 갬빗-한국정치현실의 복사판 같은 소설 [장르물 전성시대]

2021. 1. 2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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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대한민국에 ‘빨갱이’와 ‘토착왜구’만 살까? 선동적 정치인들과 이들의 맹목적 추종세력이 쏟아내는 프로파간다의 홍수 속에서 옳고 그름은 오간 데 없어지고 오직 내 편이냐 네 편이냐만 유일한 판단 잣대인 양 오도되는 세상이라니. 이윤하의 장편 〈나인폭스 갬빗〉을 읽다 보면 부지불식간 한국 정치 현실의 복사판 같단 생각이 든다. 이 스페이스오페라는 머나먼 미래의 낯선 세상이 배경이고, 작가도 한국계 미국인 이민 1.5세다. 소설 속에 낯익은 밥상 메뉴가 종종 나오지만, 한국적 요소라곤 그게 다다. 그런데 어째서 필자는 이 소설에서 한국 정치 현실을 보는 듯한 기시감을 느낄까?

<나인폭스 갬빛> 이윤하·허블 / 허블 제공
소설의 기본설정이 이해의 열쇠다. 원래 ‘역법(曆法)’은 농경사회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시간 관리체계다. 작가는 이 개념을 극도로 확장해 이른바 ‘역법역학(calendar mechanics)’으로 발전시킨다.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뒷받침된 이 신종 역학은 비단 시간 계측 수단에 그치지 않고 현실세계의 물리법칙에 일종의 마법과도 같은 영향을 미친다. 소위 ‘이능력’이란 것으로, 이것은 전장(戰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역법체계에 따라 진형을 잘 짜기만 하면 어지간한 총격에도 보병들을 거뜬히 지켜내며 우주전함 간 타격이나 요새 공성전에서도 초현실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흡사 환상소설의 단골 메뉴인 마법의 결계를 유사과학적으로 풀어냈달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법체계의 동력원이 바로 해당 구성원들의 신념 가치체계에 대한 충성도(이데올로기적 동조화 정도)란 점이다. 다수의 정신적 응집력이 물리현상을 제어한다는 점에서 작품 속 무대는 별도의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평행우주로 봐도 무방하리라.

이 소설에서 사람들은 자기네와 티끌만큼이라도 역법체계가 다른 사회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동화에 순응하지 않으면 아예 말살하려 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역법을 달리 적용하는 이른바 이단들이 생겨나면 기존의 역법역학이 와해되며 ‘이능력’ 또한 증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법역학’이란 이데올로기나 마찬가지다. 과두독재로 운영되는 ‘6두정부’는 언제 어디서든 이단의 낌새가 보이면 발본색원하는 신권정치체제다. 이런 사회에서 이해관계나 사상이 다른 사람들 간의 기탄없는 토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면 여주인공 체리스 대위가 명예대장으로 발탁·진급해 400년 전 죽은 백전노장 제다오 제독의 유령(과학적으로 살려놓은 정신적 잔존물)과 한 몸이 되어 이단세력 본거지인 바늘요새 공성전을 지휘하는 이야기의 결말을 대략 감 잡을 수 있다. 체리스는 전쟁에서 이기려 유령과 합체하는 고역을 마다하지 않지만 실은 제다오가 불사의 몸이 되기 위해 스스로 그런 신세가 되도록 6두정부를 사주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6두정부는 어떤 전쟁에서도 져본 적 없는 제다오의 지휘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에게서 이단의 조짐을 감지하고 이용만 할 뿐 신뢰하지 않는다. 상대를 이용하기는 제다오 역시 마찬가지다. 체리스든 6두정부든 이용할 대로 이용해 그는 역법체계가 사상의 자유를 억누르는 디스토피아를 끝장내고 새 세상을 열려 한다. 제다오는 민주정부의 등극을 꾀하면서도 하는 짓은 6두정부 못지않다. 결론적으로 ‘나의 파벌이 아니면 다 X’라는 식의 세계관이 SF적 설정을 통해 극대화된 버전이 바로 〈나인폭스 갬빗〉이다. 미국 독자를 위해 쓰였고 휴고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독자들이 공감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일독을 권한다.

고장원 SF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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