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를 부품으로만 보는 사회..그래도 스스로를 해고하지 마세요

서정민 2021. 1. 2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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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개봉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태겸 감독]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정은(유다인)의 삶은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바뀌었다. 7년간 사무직으로 일해온 그가 느닷없이 바닷가 중소도시의 하청업체로 파견 명령을 받은 것이다. “1년 뒤 복귀시켜주겠다”는 회사의 약속을 믿고 내려간 정은은 평소 업무와 전혀 다른 일에 당황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버티기로 한다.

28일 개봉하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정은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여정을 담은 영화다. 이태겸 감독은 2015년께 어느 신문에서 ‘사무직 중년 여성이 지방 현장직으로 부당하게 파견됐는데, 그곳에서 굉장한 치욕을 겪으면서도 결국 버텨냈다’는 기사를 읽고 이 영화를 구상했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당시 준비하던 영화가 줄줄이 무산되면서 몇년째 일이 없었어요. ‘일을 잃는다는 건 인생의 끈을 놓는 것과 같구나’ 하는 생각에 우울증까지 앓았죠. 그때 우연히 접한 기사 속 여성에게서 제 모습을 봤어요. ‘이 이야기를 직접 영화로 만들진 못하더라도 일단 시나리오라도 써보자’ 하고 한달 만에 초고를 썼어요.” 25일 만난 이 감독이 말했다.

대학 때 탈춤반 활동을 하며 마당극 연기·연출 경험을 쌓은 이 감독은 졸업 뒤 직장생활 1년 반 만에 사직서를 냈다.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점점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독립영화협의회의 교육프로그램 ‘독립영화워크숍’에서 영화를 공부하고는 “우리 사회가 제대로 해결 못 한 근대적 문제와 인간성 회복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연출한 이태겸 감독. 영화사 진진 제공

영상창작집단에 들어가 울산 조선소 노동자를 다룬 다큐멘터리 <1984: 우리는 합창한다>(2000)를 공동 연출하면서 처음 메가폰을 잡았다. 이후 연출한 단편 <복수의 길>(2005)은 당시 한국 영화에는 거의 없던,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룬 극영화였다. “경기도 성남의 어느 교회에 갔더니 공장에서 사고로 손발을 잃은 이주노동자들이 초점 잃은 눈동자로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그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가 그들을 사람이 아니라 도구로만 여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2008년 개봉한 <소년 감독> 이후 무려 13년 만에 선보이는 두번째 장편 극영화다. 스스로 해고자와 다르지 않은 시기를 보내면서 “일자리를 잃는 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뿌리째 뽑히는 것과 마찬가지인데도 우리 사회는 이를 외면하고 노동자를 부품으로만 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이런 문제의식을 영화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현장에 내려간 정은은 송전탑에 올라 정비하는 일을 해야 한다. 하청업체 직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안전복을 자기 돈 내고 사서 입는다. “우리는 일하다 잘못되면 두 번 죽어요. 한 번은 낙하, 또 한 번은 전기구이”라면서도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게 해고”라고 외친다. 정은은 고소공포증으로 철탑에 한 발짝 오르기도 버거워하지만, 쌀쌀하면서도 속 깊은 동료 직원 ‘막내’(오정세)의 도움으로 차츰 적응해나간다.

이 감독이 송전탑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는 이렇다. “철탑을 멀리서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가까이서 올려다보면 굉장히 거대하고 차갑고 위압적이에요. 그런데 사람이 올라가야 하는 거죠. 철탑 앞에 선 작은 사람이 커다란 어려움에 처한 주인공을 상징한다고 봤어요. 우리는 당연한 듯 편하게 전기를 쓰지만, 이를 위해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송전탑에 오른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고도 싶었고요.”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막바지에 정은은 최악의 상황에서 독백을 한다. “내 목줄을 타인의 손에 쥐여주고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외다리 지옥길을 걷고 있다. 그렇게 외다리 지옥길을 걷지 않기 위해,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 감독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긍정성을 찾고 인간성을 회복해야만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이렇게 생긴 긍정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간다. 현실이 쉽게 바뀌진 않아도 내가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면 결국 견디고 극복해낼 수 있다는 게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개봉 전 시사회만으로도 씨지브이(CGV) 애플리케이션에는 벌써 240개 넘는 관람평이 달렸다. “죽음과 해고 사이의 무게감에 대한 묵직한 고발. 올해의 가장 인상적인 영화로 기록될 것.” “가슴이 무거워지지만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하는 영화. 사람은 회사의 부품이 아닙니다.” “코로나로 힘든 모든 사람이 이 영화를 보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누구나 해고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은 요즘, 참으로 필요한 영화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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