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세 할머니가 성폭행은 무슨"..그런 '인식'이 문제
27가구 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 그곳에 60여년간 살았던 85세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가 자식들에게 어렵사리 털어놓은 얘긴 충격적이었다. 5년 동안 마을 이장 박모씨에게 성폭행·성추행을 당했다고 했다. 믿기 힘들었던 자녀들은 CCTV를 설치했다. 그리고 증거가 잡혔다. CCTV 화면 속엔 이장이 할머니를 성추행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할머니는 이장 박씨를 고소했다. 박씨는 처음에 본인 잘못을 다 인정한다며 각서를 썼다가 돌연 말을 바꿨다. 할머니가 남자가 그립다며 유혹했다고 했다. 수사는 어떻게 됐을까. 결과는 '무혐의', 가해자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CCTV 화면 속에서 저항하는 게 보이지 않는 점, 진술 신빙성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미 5년간 피해를 입고 있었고, 자포자기한 심경이라 했다. 신장 질환이 심각해 큰 수술을 받은 뒤, 투석까지 받을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기운도 없고 눈도 잘 안 보인다고 했다.
울며 성범죄 피해를 호소하던 할머니는 죗값을 치르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래 살며 정든 마을을 떠나야 했다.
해당 사건 뿐 아니라, 여성 노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급증하는 추세다.
60세 노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총 3442건 발생했다(경찰청 통계). 특히 2015년 565건에서 2019년 815건으로 5년 동안 44% 증가했다. 이중 강간과 강제추행이 3185건(92.5%)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홀로 사는 여성 노인들을 노린 범죄가 대다수다. 사례를 살펴보면, 지난해 9월엔 서울 노원구에서 40대 남성이 홀로 사는 80대 치매 노인을 찾아가 성추행했다. 물이 안 나온다며 화장실을 쓰겠다고 한 뒤, 신체 부위 접촉을 요구했다.
지난해 12월엔 50대 남성이 홀로 사는 여성 노인을 성폭행 한 혐의로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남성은 지난해 3월 전남 지역 한 주택에 흉기를 들고 침입, 노인을 성폭행하고 달아났다.
노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현실이 이렇지만, 수면에 안 드러나는 경우가 더 많다.
익명을 요구한 성범죄 전문 변호사는 "성범죄 피해에 대한 인식 때문인데, 노인들은 '내가 뭔가 잘못해서 겪었나'란 생각이나 '부끄러운데 그걸 어떻게 알릴까'란 생각을 가진 분들이 여전히 많다"고 했더. 이어 "피해 사실을 알렸을 때 겪을 시선, 주변에 갈 지 모르는 피해 등을 고민하느라 말 못 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범죄심리학자인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옛날엔 강간 신고율이 10%도 안 됐는데, 피해자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범죄 피해를 당한 할머니 입장에선, 명예가 엄청나게 침해 당한 것이기 때문에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힘들 것"이라고 했다.
더 큰 문제는 노인이 성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사회 인식 부족이다. 나아가 '노인에게 누가 성범죄를 저지르느냐'는 식의 통념이 제대로 된 처벌을 막고, 피해를 키운단 지적이 나온다.
오 교수는 "경찰·검찰·판사 등이 '85세나 된 사람을 누가 성폭행하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며 "그러니 나이든 여성은 범죄 피해를 당해도 인정 받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들은 일반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성인지 감수성은 연령에 상관 없이 있어야 한다"며 "나이로 따지는 건 아직 우리 사회가 그런 면에서 제대로 트여 있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영화 '69세'에서도 이 같은 사회 인식 문제를 다뤘다. 간호조무사인 20대 남성이 69세 노인을 성폭행했지만, 경찰은 '젊은 남자가 뭐가 아쉬워 노인을 성폭행하느냐'며 편견을 갖고 바라본다. 또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도 법원에선 영장이 기각된다. 가해자는 "합의한 관계인데, 치매 때문에 기억을 못하는 것"이라며 몰아 붙인다.
임순애 감독은 영화를 만든 취지에 대해 "우리 사회가 노인과 여성을 분리하고 그들을 무성적 존재로 보는 편견 때문에, 가해자의 표적이 된다는 내용을 보고 악하다고 생각했다"며 "노년의 삶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인간 존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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