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미제 사건’ 공화국

금원섭 논설위원 2021. 1. 27.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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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한민국은 ‘미제(未濟) 사건’ 공화국이 되고 있다. 작년 전국 검찰청 미제 사건이 전년 대비 36% 넘게 늘었다고 한다. 사건 해결 단서가 거의 없는 일반 미제 사건과 달리 구체적 진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는데도 이상하게 결과가 안 나오는 사건들이 있다. 정권 사람들이 연루된 불법이다. 막힐 때마다 정권의 그림자가 비친다.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 전경./조선일보DB

영구(永久) 미제가 된 사건이 벌써 나왔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이다. 가해자 전원이 ‘증발’하는 바람에 피해자만 남은 기묘한 사건이 돼 버렸다. 가해자들이 사라질 때마다 여당 의원, 경찰과 검찰이 각각 역할을 했다. 박 전 시장이 성추행으로 고소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에 민주당의 여성 단체 출신 국회의원이 있었다. 박 전 시장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수사를 다섯 달 뭉개던 경찰은 박 전 시장 성추행과 그의 측근들인 ‘서울시청 6층 사람들’의 방조는 모두 기소할 수 없다고 했다. 검찰은 박 전 시장 피소 사실을 사전 유출한 혐의가 있는 여당 의원, 검찰 고위직과 청와대 관계자에게 단체 면죄부를 나눠 줬다. 피해자는 “법적 절차를 밟아 잘못을 사과받거나 용서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다”며 절규했다.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그 상처를 헤집는 가해는 더 잔혹하다. 피해자를 “살인자로 고발하겠다”는 친문 시민 단체까지 등장했다. 피해자 가족은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 정부와 여당이 피해자와 그 가족을 보호하겠다고 나섰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김창룡(왼쪽 네번째부터) 경찰청장과 박정훈 국가경찰위원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북관에서 열린 국가수사본부(국수본) 현판식에서 제막하고 있다. 국수본은 경찰 사무를 '국가·자치·수사'로 분리하는 조직 개편에서 수사 분야를 맡는 조직이다. /뉴시스

영구 미제가 될 뻔한 사건도 있다.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택시 기사 폭행은 언론 보도가 없었으면 묻혔을 것이다. 폭행 장면이 담긴 택시 블랙박스 영상에 대해 경찰은 “녹화가 안 돼 있었다”고 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피해자가 폭행 장면이 담긴 영상을 보여줬는데 담당 수사관이 “못 본 걸로 할게요” 하며 덮었다고 한다. 명백한 은폐다. 권력의 작용이 있었거나 경찰이 알아서 뭉갰다는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정권 관련 미제 사건은 수북이 쌓여 있다. 정권이 수사 검사들은 ‘인사 학살'하고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총장은 ‘억지 징계'했다. 검찰이 기소한 뒤 1년이 다 돼 가는 울산시장 선거 공작은 재판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 피고인 13명의 혐의가 서로 연결돼 있는데 변호인들이 증거를 피고인별로 나눠달라며 시간만 끈다. 법원 정기 인사로 재판부가 바뀌면 판결이 언제 나올지 짐작도 안 된다. 청와대 전 비서실장, 현 민정비서관에 대한 검찰의 추가 수사도 사실상 중단됐다. 30년 친구의 당선이 “소원”이라는 대통령 한마디에 청와대 비서실 일곱 조직이 나선 선거 범죄인데 대통령 앞에서 수사가 멈췄다. 선거 부정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심각한 범죄다.

월성 원전 1호기 조작,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기 등에도 정권 사람들이 여럿 등장했지만 아직 뚜렷한 수사 성과가 없다. 이대로 가면 미제 사건 목록에 추가될 가능성이 있다. 정권이 저지른 불법들을 새로 출범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로 보내 묻어버리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불법을 영원히 덮을 수는 없다. 박 전 시장 성추행은 인권위가 “피해자에게 성적 굴욕감,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 언동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했다. 피해자의 다른 재판에서도 “박 전 시장의 성추행으로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입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이 차관의 택시 기사 폭행도 영상이 발견돼 재수사가 힘을 받았다.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돼 있다. 잘못 하나를 덮자고 다른 잘못을 저지르면 죄만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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