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구휼

박진석 입력 2021. 1. 27. 00:46 수정 2021. 1. 27.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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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석 사회에디터

구휼(救恤) 또는 진휼(賑恤)이라고 불렸던 백성 구제의 역사는 짧지 않다. 최초의 복지제도였던 고구려의 진대법을 필두로 의창·환곡·견감 같은 제도들이 속속 시행됐다. 곡식의 춘대추납, 조세나 요역의 면제 또는 경감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복지 제도가 없던 시절 백성이 기댈 것은 이런 제도를 통해 내려지는 나라님의 은전뿐이었다.

임금 역시 애민혜휼(愛民惠恤)을 왕자(王者)의 도리로 여겼다.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를 황정(荒政)이라 따로 이르면서 각별히 챙겼다. 조선 시대 선조는 임진왜란 때 피난길에서 돌아온 직후 자신 몫의 양식 절반을 다섯 곳의 진장(賑場·임시구호소)에 보내도록 했다. 영조가 흥화문에 거지 100여명을 불러놓고 죽을 쑤어 먹였다는 일화도 있다.

임금의 도리는 곧 신하의 도리였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황정을 잘 다스려야만 목민의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경국대전』에는 “백성 진휼에 힘쓰지 않아 사망자를 많이 내고도 보고하지 않은 관리에게는 중죄를 적용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신종 전염병의 창궐로 피해를 본 시전 상인들을 위해 손실보상제라는 새 구휼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윗선의 의지가 명확해 보이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작금의 관리들은 불경스러운 태도다. “이 나라가 그대들의 나라인가”라는 정승의 질타도 먹혀들지 않았다. 느닷없는 국가 소유주 논란 촉발의 적절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적당한 수준의 나랏돈 풀기는 여러 측면에서 약이 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호조판서가 상소문에 담은 대로 나라 곳간이 화수분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명백하다. 가뜩이나 당금 주상의 치세 들어 구휼미를 계속 풀면서 곳간의 밀도가 낮아진 상황이니 곳간 지기의 걱정을 관리 특유의 ‘현실 안주’병으로 치부할 것도 아니다.

쟁론을 보다 못한 나라님이 “재정이 감당하는 범위에서 제도화하라”고 어명을 내리면서 교통정리에 나섰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재정 감당 범위’를 계량화하는 작업부터 쉬울 리 없다. 그것도 한성판윤과 동래부사 자리를 탐내는 이들이 ‘재정 감당 범위’의 대폭 상향 조정을 요구할 것이라는 게 정한 이치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말이다. 건투를 빌 뿐이다.

박진석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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