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연극, 아니면 반공극, 아니면 새마을 연극!

박성준 입력 2021. 1. 26.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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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70년의 自省 ①
산불(1962)-차범석 원작의 한국 리얼리즘 연극 대표작이자 수작. 대사 컨닝을 위한 프롬프터가 사라진 최초 무대. 
“되돌아보면 국립극단이 한국 연극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70년의 대부분 동안 한국 연극문화의 견인차 구실을 하지도 못했으며 사회의 변화를 읽어내고 주도하지도 못한 채 연극계 한 켠에서 명맥을 이어왔다.”  -국립극단 70+ 아카이빙-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값진 건 그만큼 드문 일이어서다. 그런데 국립극단이 최근 펴낸 70년사 ‘국립극단 70+ 아카이빙’은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만큼 국립극단이 오랜 역사 동안 쌓은 공과가 작지 않은 데다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라는 예술의 가장 중요한 토대를 스스로 허문 업보가 크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국책연극, 아니면 반공극, 아니면 새마을 연극

국립극단은 광복 전후 혼란기를 거쳐 1950년 당나라와 싸우는 신라 화랑 ‘원술’을 기리는 ‘원술랑’을 무대에 올리며 창단됐다. 지난해 창단 70년을 맞게 된 국립극단은 연극 평론가 8인으로 70년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국립극단의 어제와 오늘을 가감 없이 기록했다. 3년에 걸쳐 작업을 진행한 이들은 ‘어느 시기 무슨 공연이 있었다’식의 연대기가 아니라 중요한 변곡점을 짚어내고 그 안에서 국립극단 성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심층적으로 들여다봤다. ‘국립극단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다’를 화두 삼은 김방옥 연극평론가의 평가는 이렇다.

“창단 직후 ‘원술랑’, ‘뇌우’ 공연이 해방 후 혼란과 가난에 시달리던 관객에게 일시 호응을 받았으나 전쟁으로 곧 열기가 식어버렸고 피난 시절이나 4·19혁명 후 국립극단은 사회 변혁과 동떨어진 레퍼토리 선정과 공연활동으로 지탄을 받았다. 그 후로 차범석·노경식·천승세 등 몇몇 사실주의 작가들과 오태석을 발굴한 것 정도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지지부진했다. 1970년대에 연극계가 예술적으로 활기를 띠었을 때 그 기운에 동참하지 못했으며 유신 독재가 심화하면서 남산으로 물러나 대형 계몽 사극을 공연하는 등 관의 들러리로서 무력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뇌우(1950)’-창단 기념 두번째 공연으로 혼란스러운 중국 근대사 두 가족 이야기. 유치진 연출로 당시 7만5000명이 관람한 대화제작. 2005년 4시간30분짜리로 삼연.
특히 ‘성웅 이순신(1973년)’으로 대표되는 ‘국책연극’은 독재정권에 복무했던 국립극단의 오욕이다. 군사정권 시절 문화부 과장급이나 퇴역 대령이 국립극장장을 맡는 시절에 국립극단이 무대에 올린 작품은 민족정신을 발양하는 역사극, 아니면 반공극과 새마을운동 연극으로 대별된다. 문화부 장관이 리허설에 와서 작품을 대폭 수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국립극단에 주어진 책무는 ‘국시에 적합한 창작 희곡의 상연’. 그나마 1977년 ‘인생차압’을 시작으로 소극장 연극에서 실험적 작품이 올라가며 젊은 작가와 연출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그럼에도 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예술에 대한 검열을 노골적으로 시행하는 한편 국립극단을 공공연히 정권홍보의 도구로 삼고자 했다. 민간 연극계는 70년대부터 극단 실험극장, 동인극장 등 동인제 극단들이 전성기를 만들었다. 이처럼 소극장과 민간극단이 번성하면서 역동적인 기운이 가득했으나 국립극단은 80년대 중반에야 국책연극 풍토에서 벗어나 비로소 한국적 전통이 살아있는 연극, 고정 레퍼토리 시스템, 명작 만들기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제법 구체적 성과를 만들어냈다. 2002년 초대 예술감독 김철리 이후 2004년 이윤택 예술감독, 2006년 오태석 예술감독 체제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활기를 얻고 명작 레퍼토리 구축과 신작 개발, 실험을 조화시켜 나갔다. 외형 역시 김대중 정부 때 책임운영기관으로, 다시 이명박 정부 때 법인화로 변하면서 2015년 명동예술극장과 합병되는 길을 걸었다. 이러한 외형 변모는 대체로 연극계나 국립극단 자체 의견 수렴 없이 정권에 의해 일방추진됐다. 특히 법인화 과정은 이명박 정부 초대 문화부 장관 유인촌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남산 국립극장을 쫓기듯 나와 서울역 뒤편 옛 기무사령부 수송대 부지에 번지수도 없던 허름한 가건물을 극장으로 개조한 게 지금 길가 차 소리가 그대로 객석에까지 전달되는 국립극단 현주소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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