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나의 나타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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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은 이 시 하나로 충분하다.
혹독한 이 겨울을 시 하나로 건너고 있다.
백석의 나타샤는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 도량으로 만든 기생 자야(김영한, 1916~1999)라는 게 통설이지만, 나타샤가 굳이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면 또 어떠랴.
나의 나타샤에게 이 시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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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은 이 시 하나로 충분하다. 시 하나로 나를 견뎌내고 있다. 혹독한 이 겨울을 시 하나로 건너고 있다. 내 영혼이 가난하고 내 안은 번잡하지만, 시 한 편이 날 비운다.
우연이었다. 서울에 폭설이 푹푹 나리던 날, 난 이런저런 이유로 우울했다. 도시의 골목을 걷게 됐다. 몇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눈발 사이로 언뜻 스쳐 지나간 간판, 그 시의 제목을 상호로 빌린 북카페였다.
나타샤, 오랜 세월 잊었던 이름이었다. 간판에는 흰 당나귀까지 그려져 있다. 응앙응앙 당나귀 울음소리가 들리고 눈은 고조곤히 쌓여만 갔다.
소주 한 잔의 유혹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나는 순댓국집에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누군가를 많이 그리워했다. 그와 같이 흰 당나귀 등을 타고 출출이(뱁새) 우는 산골로 떠나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소싯적에 이 시를 한 번쯤은 필사했거나 연애편지에 몇 구절을 훔쳤을 것이나, 모진 세월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이 시를 잊게 했으리라. 좁은 지면임에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년 발표) 전문을 백석의 시어 그대로 옮긴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너를 '사랑하고'가 아니라 '사랑은 하고'다. 가난한 그는 나타샤를 사랑하지만 현실은 어렵다. 깊은 산골 마가리(오막살이)에 살고 싶은 건 소망이자 환상이다. 하지만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세상을 버리는 것이라고 가난을 위안한다.
백석의 나타샤는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 도량으로 만든 기생 자야(김영한, 1916~1999)라는 게 통설이지만, 나타샤가 굳이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면 또 어떠랴. 누구의 가슴속에도 나타샤는 어떤 형태로, 어떤 낱말로, 어떤 이미지로 있을 것이다.
나도 힘들고 당신도 힘들고 모두 힘들다. 일본 유학, 훤칠한 외모, 당대의 모던 보이, 대책 없는 연애꾼, 윤동주가 그의 시를 필사해 가슴에 품고 다녔다는 백석(1912~1996). 월북 작가가 아님에도 고향인 평안도 정주에 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남에서 부정된 채 삼수갑산 양치기로 살다 간 그의 생애도, 비록 지금은 소월과 지용과 만해를 넘어 100여편의 시만으로 단연 한국 문학의 북극성이라는 위치에 올랐지만, 힘들고 고독했을 게다.
일본인 친구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와 술을 마시며 써주었다는 '나는 취했노라'를 읽는다.
"나 취했노라/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의 술에 취했노라/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한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나 이 밤의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
나의 나타샤에게 이 시를 바친다. 창밖엔 흰 눈이 아닌 찬비가 내리고 있다.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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