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권 보장'..성폭력 피해의 관점 넓히다
[경향신문]
“성희롱 못지않게 노동권 측면에서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사안” “성희롱을 보는 관점을 ‘성적 언동의 수위·빈도’에서 ‘고용 환경에 미치는 영향’으로 전환해야”.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25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성희롱’으로 판단하며 내린 결론이다. 인권위 조사 결과는 수사기관에서 밝히지 못한 성폭력 실체를 확인한 한편 피해자를 계속 일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할 ‘노동자’로 봐야 한다는 점에서 인식의 지평을 넓힌 의미가 있다.
성폭력 피해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측면에서 주로 다뤄져왔다. 일터 성폭력은 결국 ‘노동권’ 박탈로 이어짐에도 이 부분은 잘 조명되지 않았다.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중심서
‘노동자 정체성’까지 인식 확장
“함께 계속 일하고, 존중받아야
동료들도 피해자 지지·연대를”
피해자들은 끊임없이 노동자 정체성을 이야기해왔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피해자 A씨는 25일 기자회견에서 “저의 안전과 자존감, 커리어 때문에 모든 것을 숨기고 싶었다”며 “적극적으로 시장실 업무의 모든 상황에 임했던 것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제 소임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피해자인 김지은씨가 지난해 낸 책 <김지은입니다>도 수행비서로 묵묵히 일한, 노동자로서의 기록이었다.
피해자의 노동자성이 덜 주목받는 이면에는 여러 문제가 얽혀 있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은 “성폭력을 구조나 조직이 아닌 개인 간 문제로 보는 시각이 ‘노동자로서의 피해자’를 지워버린다”고 지적했다. 이영희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노무사는 “노동권을 성적 자기결정권보다 덜 중요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자기결정권은 여전히 ‘정조’ 개념에 머물러 있어 피해자에겐 ‘지켜야 할 의무’로 작용한다. ‘(성폭력이 있었다면) 왜 진작 그만두지 않았냐’는 2차 피해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노동현장의 구조를 성폭력 원인으로 짚었지만 한계도 드러냈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인권위가 성폭력이 ‘낮은 성인지 감수성’을 가진 비서실 문화 속에서 이뤄진 점을 언급하면서도 조직구조 개선을 권고하지 않은 점이 아쉽다고 했다. 그는 “하위직에는 여성, 고위직에는 남성이 편중돼 있고 감정 수발은 여성에게 전가하는 구조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비서 운용 관행, 성차별적 구조나 직급체계에 관해 더 구체적인 개선 요구가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회복해야 할 일상은 ‘성평등한 일상’이 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배 대표는 “피해자는 똑같이 차별받고, 무시받고 비하당하는 일상이 아니라 동등한 노동자로 인정받고, 열심히 성장해 그 조직 최고 자리까지 꿈꿀 수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그곳에서 계속 일하고, 임금을 받고,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권이 존중받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이소희 소장은 동료들의 지지와 연대를 강조했다. 그는 “ ‘저 사람은 공동체를 시끄럽게 한 사람’이라고 하기보다 ‘이 직장에서 성희롱 문제 해결과 조직 변화를 위해 용기 있는 걸음을 해준 사람’이라고 여기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민지·오경민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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