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형 성범죄' 앞에 무너진 피해자보호, '원칙대로' 되돌려야

임재우 2021. 1. 2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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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은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 못지않게, 이 사건을 처리하는 한국 사회의 논의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되새길 대목이 많다.

결국 한국 사회에 주어진 과제는 가해자가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성폭력 사건 대응은 법과 제도에 규정된 피해자 보호와 진상 규명이라는 원칙 아래에 절차대로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을 복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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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사망과 성추행 논란]'피해자 관점 대응' 원칙 소환한 인권위 판단
가해자 지위따라 왜곡된 대응에 불신 쌓여
지난해 7월15일 서울의 한 대학 도서관 앞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은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 못지않게, 이 사건을 처리하는 한국 사회의 논의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되새길 대목이 많다. 특히 우리 사회가 어렵게 쌓아온 권력형 성범죄 대응 원칙이 무너진 자리가 크게 다가온다. 원칙과 원칙에 대한 믿음의 복원이라는 어려운 길이 놓였다.

‘박 전 시장의 언동은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25일 국가인권위원회 판단은 다시 세워야 할 원칙의 방향을 대략이나마 제시하고 있다.

먼저 피해자 관점의 대응 원칙이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이 숨져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까지 고려한 뒤, 피해자가 제시한 증거를 바탕으로 위력에 의한 성희롱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참고인과 피해자 진술의 구체성·일관성에 근거할 때 박 시장 행위는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인권위는 “성희롱 인정 여부는 성적 언동의 수위나 빈도가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업무 관련성 및 성적 언동이 있었는지 여부가 관건”이라고 밝혔다. 권력형 성폭력이 발생할 때마다 반복되는 ‘수위’에 대한 검증을 성희롱 판단의 근거로 삼지 않은 것이다. ‘서울시장 위력성폭력 사건 피해자·변호인단·피해자 지원단체’는 “인권위가 보통의 성희롱 사건보다 더 엄격한 기준으로 판단한 결과로도 (성희롱이) 인정된 사실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인권위는 또 “박 시장이 9년 동안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며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반면, 피해자는 하위 직급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위계와 성역할 고정관념이 만연한 조직문화를 성희롱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으로 꼽았다.

박 전 시장 피해자의 직무 배치와 업무는 남성 상급자에 대한 ‘심기 노동’을 여성 하급자에게 떠맡기는 성차별적 조직문화를 여실히 드러냈다. 상사의 심기를 업무 대상으로 삼는 노동은 결국 직무의 경계를 넘는 사적 노무, 나아가 성희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상사의 심기가 제일 중요한 업무 대상이 되다 보면, 상사가 부당한 행동을 했을 때, 자기 선에서 이를 피하거나 제지하는 것이 업무상 금지된 행동이 되어버린다”고 했다. 인권위가 서울시에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비서실 업무 관행 개선”을 주문한 이유다.

전문가들은 박 전 시장 사건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으로 성폭력 발생 시 대응 원칙이 가해자의 지위와 업적에 따라 달라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성폭력 사건 대리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는 “박 전 시장 사건이 부른 심각한 피해 중 하나는 가해자의 정치적 지위가 높으면 권력형 성범죄 피해에 대한 구제 절차가 왜곡될 수 있다는 사회적 불신을 낳았다는 점”이라고 했다. 원칙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불신이 채웠다.

이 사건 피해자는 인권위 조사 결과가 나온 직후 입장문을 통해 “4년 동안 많이 힘들었다. 지난 6개월은 더 힘들었다”고 고통스러운 소회를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인권위 발표에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담겼다. 우리 사회가 변화해 나아가야 할 부분이 언급됐다. 사실 인정, 진실 규명이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건 국가기관에서 책임 있게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시간들이다. 이 시간이 우리 사회를 개선할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한국 사회에 주어진 과제는 가해자가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성폭력 사건 대응은 법과 제도에 규정된 피해자 보호와 진상 규명이라는 원칙 아래에 절차대로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을 복원하는 일이다. ‘그럴 분이 아닌 분’은 없기 때문이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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