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쟁이로 살았던 내가.. "이제 희망을 얘기합니다" [Guideposts]

정순민 2021. 1. 2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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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의 덫에서 빠져나온 시드니 스미스
마약 판매상·도둑·13년 수감..
석방 후 마약하다 다시 체포
마지막 기회된 기숙 치료시설서
하나님께 굴종하고 받은 영적 치유
사회복지학 공부하며 '새로운 삶'
약물치료센터 카운슬러로 활약
중독자들 지배한 절망을 희망으로
"그분은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신다"
미국 미시시피주 걸프포트에 사는 시드니 스미스는 마약중독자였다. 마약 때문에 감옥에도 갔던 그는 늦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마약중독자들을 돕는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내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건 단 한 번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아내와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했다.
맑은 정신으로 살아보겠다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시도한 뒤 몇 달이 흘렀다. 다 내던지려던 참이었다. 나는 미시시피주 조지타운에 있는 약물 및 알코올중독 기숙치료시설인 머시하우스의 기숙사 방에 서 있었다. 머시하우스는 신앙에 기반을 둔 곳으로, 종래의 약물남용 치료법과 더불어 영적 성장을 강조했다.

크랙 코카인 중독으로 거의 30년 동안 수많은 재활치료센터를 들락거렸다. 어떤 곳도 이렇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 예수님, 성경을 공부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시설 내 중고품매장, 자동차수리점, 공예공방에서 일했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게 맑은 정신으로 지내는 핵심이라고 들었다.

내가 그 얘기를 믿는다고 확신하지는 않았다.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살던 10대 시절에 크랙을 시작했다. 중독자, 마약판매상, 도둑, 커다란 쓰레기통 뒤에 사는 마약쟁이가 되었다. 약에 취하려고 아이를 포기한 아빠, 법망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를 거쳐 미시시피 교도소의 재소자가 되었다.

이제는 여기였다. 석방 후에 마약을 하다가 체포된 다음, 너그럽게 봐달라고 가석방 담당관을 설득했다. 그중에는 교도소에서 13년을 보내도 내 중독을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 아내 주디도 있었다.

머시하우스에서는 마약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중독자의 버릇은 여전했다. 내 전부를 드러내지 않았다. 매일 주된 질문은 '어떻게 해야 여기서 나갈 방법을 교묘히 꾸며낼 수 있을까'였으니까.

오늘은 자제력을 놓아버렸다. 일자리 하나에서 제외되어 다른 일을 재배정받았다.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여기는 지긋지긋해. 나가고 싶다고."

결국 감옥 신세가 된다 한들 상관없었다. 그곳에서라면 최소한 존중받는 법은 알고 있으니까.

내 기숙사 방으로 몰래 들어갔다. 방에서라면 누구도 나를 볼 수 없다. 주간에는 방에 있으면 안됐다.

가방에 내 소지품을 던져 넣었다. 머시하우스는 감금시설이 아니었다. 누구도 내가 떠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약에 취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폼나게 죽는 편이 나았다.

잠시 멈췄다. 나간다면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42세였다. 징역형은 이제 종신형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디는 벌써 이혼 서류를 세 번이나 제출했다가 마음을 바꿨다. 끈질기게 희망을 품는 아내였지만, 이번에는 그런 아내도 영영 떠나겠지.

"하나님! 사람들의 말처럼 여기 계시는 분이라면 당장 모습을 드러내셔야 해요! 저는 다 끝나버렸거든요!" 큰소리로 외쳤다.

멈췄다. 귀를 기울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다 크랙에 중독되었는지는 쉽사리 설명하기 어렵다. 그랬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오클랜드는 범죄와 약물사용 비율이 높은 곳이다. 게다가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보이지도 않았고 계부도 좋은 아빠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우체국에서 근무했던 엄마는 한결같은 부양자였다. 엄마는 나를 사립학교에 보냈고 옳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나는 어쩌자고 10대에 처음 술을 마셨을까? 왜 학교에서 마약 거래를 시작했을까? 왜 크랙을 해봤을까?

내가 아는 건 마약이 악순환을 만든다는 점이었다. 일단 중독되자 약에 취할 돈이 필요했다. 도둑질하다가 마약거래상이 되었다. 버는 족족 크랙에 썼고 결국 거리에 나앉아 쓰레기통을 뒤져서 배를 채웠다. 한 여자를 임신시키고는 여자와 아들을 버렸다.

부끄러운 삶이었다. 마약으로 수치심이 무뎌졌다. 회복하겠다고 다짐하고 재활시설에 입소도 하고 여러 도시에서 인생을 새로 시작해보기도 했다.

결국 미시시피에 흘러들었다. 친척들이 있는 곳이다. 백화점 체인 JC페니에서 임시 일자리를 구했고 거기서 비주얼 머천다이징을 하는 주디를 만났다. 마약에 찌든 과거에 솔직한 척하면서 아내를 유혹했다.

"2년 동안 마약에 손대지 않았어요."

큰소리를 쳤다. 2시간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겠지.

우리가 결혼하는 데 꼭 필요한 만큼만 멀쩡한 척했다. 주디는 경고 신호를 봤지만 자기가 날 올바른 궤도에 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말했듯이 아내는 끈질기게 희망을 품는 사람이니까. 우리는 교회에 나갔지만 내 경우 시늉만 했을 뿐이다.

머시하우스는 사실상 교회였다. 우리는 오전 5시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으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일도 하고 신실한 사람의 49가지 성품을 자세히 쓴 책을 공부하기도 했다.

다 헛소리라고 혼잣말하려 했다. 하지만 예수라는 사내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용서? 새로운 삶? 나한테도?

용서받고 흠잡을 데 없는 경력으로 다시 시작한다면 근사하겠지. 아내가 의지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 달리기를 멈추고 신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몹시 고민하면서 방에 서 있었다. 그러다 다시 외쳤다.

"하나님!"

이번에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더니 날 응시했다. 병가를 잠으로 보내던 룸메이트였다. 내가 악을 쓰며 불평하는 걸 얼마나 들었을까? 룸메이트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날 보고는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갔다.

머리를 늘어뜨렸다. 누가 봐도 하나님께서 날 구하러 오시는 건 아니었다.

그러다가 그것을 느꼈다. 묵직한 것이 날 바닥에 거의 쓰러뜨렸다. 그간 저지른 온갖 못된 짓이 날 짓누르다가 잠시 후에 걷혔다. 높은 곳에서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는 없었다. 찬란한 빛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내 울부짖음을 듣고 새로운 길로 나를 돌려세우셨다는 내면의 확신만 있을 뿐이었다.

독감에 걸린 것처럼 기진맥진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가방을 풀고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이후 며칠에 걸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마음속으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는 마약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주디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저 내 머리에서 그런 결점을 없애주신다는 건 믿어지지 않는 얘기였다.

머시하우스 프로그램에 충실하면서 제대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기도하다가 손쓸 틈 없이 치유해주신 하나님께 화를 냈다.

"그저 손가락을 까딱여서 해주실 수 있는 일이라면 어째서 제가 27년 동안 괴로워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안기도록 내버려두셨어요?"

하나님은 내가 굴종했을 때 행동하셨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때까지 내가 드린 기도는 하나같이 하나님도 내 뜻대로 움직이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마치 다른 모든 이를 교묘히 조종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청하는 내 간청이 마음에서 우러날 때까지 기다리셨다.

이후 나를 찾아온 주디는 방을 가로지르기도 전에 울기 시작했다. 내 얼굴에 나타난 변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머시하우스를 졸업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한 가지 직업을 6개월 이상 유지한 적도 없고, 투표한 적도, 세금을 납부한 적도 없다. 머시하우스에서 나온 이후 커뮤니티 칼리지에 등록했고 그다음에는 서던미시시피 대학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학사 학위 공부를 하는 동안 내가 인턴십을 어디로 배정받았는지 맞힐 수 있겠는가? 바로 내가 마약거래와 절도죄로 재판받고 20년을 선고받은 바로 그 법정이었다. 내 사건을 기소했던 지방검사는 이제 그곳의 판사가 되었다. 판사는 나를 알아보고 법원 밖에서 포옹해도 되는지 물었다.

서던미시시피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사회복지학 석사를 취득했다. 재향군인회에서 인턴으로 일한 후에는 빌록시에 있는 약물 및 알코올 외래집중치료센터의 카운슬러가 되었고 걸프포트 경찰서에서 자문역으로 활동했다. 중독 회복과 약물범죄자 재활에 있어서 종교적인 믿음의 역할을 전문기관에 설명하기도 한다.

내가 맡은 이들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나는 정확히 안다. 최근에 한 사람이 감옥에서 출소하고 찾아왔다. 자기를 맡은 사회복지사도 한때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에 상담자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교도소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락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얘기했다. 상담자와 그 남자친구는 한집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 친구들이 전화 두 대를 나란히 붙여놓고 스피커폰으로 돌려주었다.

"선생님은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상담자가 말했다.

사무실 벽에 졸업장, 상장, 신문에서 오려내 액자에 끼운 기사를 걸었다. 기사 속 사진에는 나와 걸프포트 경찰서장이 같이 있으며 제목에는 '새로운 삶'이라고 쓰여 있다.

그 곁에는 나의 징역형 판결문 복사본이 액자에 담겨 있다. 찾아온 이들이 이 두 가지를 꼭 보게끔 한다.

중독자의 지배적인 감정은 절망이다. 언제나 희망이 있다는 걸 상담자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새로운 삶을 그들도 제안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이드포스트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의 후원을 통해 군부대, 경찰, 교정시설, 복지시설, 대안학교 등 각계의 소외된 계층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 더 많은 이웃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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