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칼럼] 누구를 위하여 드론을 날리나

한겨레 2021. 1. 2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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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칼럼]천문학적 재원을 쏟아붓는 주요 산업정책은 재계의 논리에 의존하면서, 사람의 생명이 걸린 노동인권 문제가 나오면 기계적인 노사중립을 표방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값싼 생명값을 담보로 기업이 성장하면 전국민이 잘살게 된다고 호도하던 시대는 지났다. 코로나 양극화로 삶의 벼랑 끝에 선 대다수 서민들에게 '나중에'는 없다.

이진순 ㅣ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지난해 10월30일 문재인 대통령이 미래차 산업현장 방문차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을 찾았을 때 일이다. 응급구조용 드론을 시찰하던 중 “사람을 구조할 때뿐 아니라 요즘 택배기사들이 고생들을 많이 하는데 이런 데(드론)에 담아서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대통령이 즉석에서 내자, 행사 관계자들은 “택배기사들을 위한 멋진 아이디어”라며 반색을 했다. 이 소식은 여러 언론에 “드론 보자마자 택배노동자 떠올린 문 대통령” “드론으로 택배기사들이…아이디어 낸 문” 등의 제목으로 기사화되었다.

대통령이 첨단산업 현장을 탐방하고 기업 관계자들을 격려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택배기사들의 고충을 덜어주고 싶어 하는 대통령의 마음도 애틋하다. 그러나 실제 택배기사들에게도 이 에피소드가 미담으로 들릴까? 드론이 보편적 운송수단이 된다는 건, 오토바이나 화물차를 타고 골목골목을 누비는 택배노동자들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상식이다. 아쉽게도 그 자리에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외칠 정직한 삼척동자가 단 한 명도 없었나 보다.

이보다 한 해 전인 2019년 10월 정부는 ‘드론택배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3단계 규제혁파 로드맵’을 확정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이낙연 총리 주재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는 ‘영리 목적의 드론 운송 신산업시대’를 열기 위해 35건의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히면서 이를 통해 2028년까지 21조1천억원 규모의 생산유발 효과와 17만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기대된다고 전망했다.

이미 중국이 세계 드론산업의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발주자인 한국이 그 틈새를 어떻게 뚫고 나갈지에 대한 묘수는 보이지 않는다. 전국 5만4천명의 택배기사들이 앞으로 어떻게 호구지책을 마련해 나갈지에 대해서도 답이 없다. 장밋빛 전망과 실체 없는 숫자가 난무할 뿐이다. 산업환경이 획기적으로 변화하는 시점에 기술과 물류의 혁신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기술발전에 따른 대규모 실직에 어떻게 대응할지 면밀한 대책을 세우는 것도 정부의 역할이다. 규제 완화와 정부 지원을 줄곧 요구해온 재계의 입장과 차별성이 없다면 국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해 “노동계는 노동계대로, 경영계는 경영계대로 불만을 표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첫발을 내디뎠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중요한 첫발치고는 매우 기형적이고 불길한 첫발이다.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이 소속된 5인 미만 사업장이 제외되었고 전체 사업장의 98%를 차지하는 50인 미만 사업장도 3년간 적용이 유예되었다. 법안의 실효성을 가름할 시행령 제정을 앞두고 경영자단체에서는 벌써부터 배수진을 치고 법안을 무력화시키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자칫하면 김용균도 구제할 수 없도록 만든 김용균법 시행령처럼, 이미 만신창이가 된 중대재해법마저도 무용지물로 만드는 시행령이 나올까 걱정스럽다.

천문학적 재원을 쏟아붓는 주요 산업정책은 재계의 논리에 의존하면서, 사람의 생명이 걸린 노동인권 문제가 나오면 기계적인 노사중립을 표방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에 국민동의청원을 제출한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법안 발의자인데도 발의자로서 국회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유족들의 끈질긴 요구와 여론의 압력에 떠밀려 마지못해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 참고인 자격으로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김용근 상근 부회장과 나란히 김미숙, 이용관씨에게 5분씩 발언 기회를 준 것이 전부다. 애초 김미숙씨가 제안한 법안은 “중대재해법에 청원의 취지가 반영되었으므로 본회의에 부의하지 않는다”며 토론도 없이 종결되었다. 고 이한빛 피디의 아버지 이용관씨는 “(청원에 참여한) 10만명의 김용균을 우롱하는 거다. 이게 국민을 위한 국회냐?”고 절규했다.

값싼 생명값을 담보로 기업이 성장하면 전국민이 잘살게 된다고 호도하던 시대는 지났다. 양적 성장지표와 낙수효과를 앞세워온 과거 정권과는 달라야 한다. 코로나 양극화로 삶의 벼랑 끝에 선 대다수 서민들에게 ‘나중에’는 없다. 이들에게 ‘제외’와 ‘유예’와 ‘믿고 인내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가 총파업의 파국을 막고 1차 합의문을 내놓을 수 있었던 건, 택배노동자 당사자들이 겪는 삶의 문제를 최우선에 놓았기 때문이다. 해결의 열쇠는, 사회적 약자를 지키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이지 드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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