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한국 심장에 '비수'를 들이대다
청와대는 ‘아베의 급습’을 일본의 턱밑까지 쫓아온 한국 경제를 쓰러뜨리기 위한 ‘경제 침략’이라고 받아들였다. 한국이 지난 대법 판결에 대한 일본의 불만에 무심했다면, 일본은 한국인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한의 정서’에 무지했던 것이다. 국가 간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무력행사를 허용했던 20세기 초였다면, 한-일은 2019년 가을께 실제 전쟁을 벌였을지 모른다.
일본이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에 적극 대응하지 않는 한국에 ‘보복’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가 인지한 것은 남-북-미의 판문점 깜짝 만남이 이뤄진 2019년 6월30일 당일이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사상적으로 가까운 <산케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수출관리 운영을 변경해 텔레비전, 스마트폰 등 유기 이엘(EL)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사용되는 플루오린폴리이미드, 반도체 제조에 불가결한 레지스트,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등 3가지 품목의 수출 규제를 7월4일부터 강화한다. 징용공 소송에 대해 한국이 관계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사실상의 대항 조처”라고 보도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확인을 요청하는 당일 <한겨레> 질의에 “아직 일본에서 통보받은 바 없다. 사실관계를 파악 중”이라고 답했다.
‘설마’ 했던 보도 내용은 사실이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튿날인 7월1일 이 충격적인 뉴스가 사실임을 확인하는 보도자료를 내놓는다. 일본의 보복 조처는 두가지였다. 첫째 4일부터 고순도 불화수소 등 반도체 생산에 꼭 필요한 3개 물질의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는 것, 둘째 전략물자에 대한 수출 규제 우대 조처가 적용되는 이른바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두달 뒤인 9월3일 <마이니치신문>의 심층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2019년 초부터 비밀리에 한국에 대한 보복 조처를 검토하고 있었다. 아베는 연초 “의연한 대응을 위한 구체적 조처를 검토할 것”을 지시했고, 6월 들어선 “뜻을 굽히지 말고, 출구를 찾아가면서 결행해줬으면 한다”는 뜻을 재차 밝혔다.
6월 말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직후 보복을 결행한다는 ‘고(go) 사인’이 떨어진 것은 6월20일 후루야 가즈유키 관방부장관보 주재로 외무성과 경제산업성 사무차관 등이 참석한 회의 석상에서였다. “갑작스레 반도체에 손대는 것은 어렵다”는 신중론도 있었지만, “과감하게 안 하면 문재인 정권에 (일본의 불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일본이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경제 성장의 핵심축 역할을 해온 반도체 산업에 ‘비열한 보복’의 칼날을 들이댄 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조처는 말 그대로 한국의 심장에 비수를 들이댄 것이었다. 이지평 엘지경제연구원 상근자문위원은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의 논문집 ‘한일관계―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풀어야 하나’에서 “3개 물질의 수입 규모는 2018년 기준으로 3억~4억달러에 불과했지만, 이들 제품이 없으면 연간 1500억달러 이상이나 되는 반도체 수출에 심각한 타격이 예상”된다고 평했다.
조세영 외교부 제1차관은 조처가 공개된 당일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들여 “금번 조치가 우리 연관 산업은 물론 양국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하게 항의했고,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대응책을 논의했다.
며칠 전 오사카에서 ‘어색한 악수’를 하고 헤어진 지 사흘 만에 등 뒤에 비수를 꽂은 아베 총리의 ‘정확한 의도’를 청와대는 이해하지 못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2일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이 아니다’라고 강변했지만, 이는 ‘삶은 소대가리가 앙천대소할’ 궤변이었다.
아베 총리는 이튿날인 3일 도쿄 지요다구의 일본 기자클럽에서 진행된 당수토론 석상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징용공 문제는 역사 문제가 아니라 국제법, 즉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을 지키는가의 문제”라고 말했다. 즉, 2018년 10월30일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이 외교 협의(1월9일)와 중재 요청(5월20일) 등 문제 해결을 거듭 요구하는데도 한국이 무시해 왔기에 이번 조처를 꺼내 들었다는 ‘고백’이었다.
하지만 공격당한 한국이 “미안하다. 앞으로 성실히 협의하겠다”고 반응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청와대는 ‘아베의 급습’을 일본의 턱밑까지 쫓아온 한국 경제를 쓰러뜨리기 위한 ‘경제 침략’이라고 받아들였다. 이 같은 국난을 극복하려면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중재를 통해 ‘급한 불’을 끄고, 중장기적으로는 대일 의존도가 높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을 강화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했다.
정부·여당 관계자들의 발언 역시 대일 강경책을 호소하고, 우리 안의 ‘토착왜구’를 박멸하자는 격앙된 내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전남도청을 방문해 “전남 주민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 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말했고,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동학농민운동을 배경으로 한 ‘죽창가’를 링크하며 애국이냐 이적이냐는 이분법적 논리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더불어민주당은 11일 만든 일본경제보복대책특별위원회에 쓰인 ‘보복’이란 용어를 17일 ‘침략’으로 바꿨고, 시민들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한국이 지난 대법 판결에 대한 일본의 불만에 무심했다면, 일본은 한국인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한의 정서’에 무지했던 것이다. 국가 간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무력행사를 허용했던 20세기 초였다면, 한-일은 2019년 가을께 실제 전쟁을 벌였을지 모른다.
국가 간에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 이상 반드시 승리해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8일 청와대로 5당 대표를 불러 모았다. 이 만남에서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일본이 실제로 보복 조치를 취한다면 대한민국을 안보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제 보복에 지소미아 파기로 대응해야 한다는 구상이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늘 그랬듯 승부처는 미국의 입장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아폴로 11호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하는 백악관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 갈등에 관여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내가 얼마나 많은 문제에 관여해야 하냐”는 썰렁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을 거쳐 한국을 찾은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닷새 뒤인 24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결코 한국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볼턴은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에서 이 만남에 대해 “한국은 1965년의 한-일 기본관계조약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고 있다는 인식은 전혀 없이 그저 한국 대법원의 결정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만 늘어놓았다”고 적었다. 정 실장은 이날 한국이 지소미아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을 처음 밝힌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동맹을 경시해온 트럼프 행정부도 ‘최소한의 개입’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로이터> 통신은 30일 미국이 한·일 두 나라에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멈추고, 한국은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 절차를 정지하는 ‘현상유지 협정’(standstill agreement)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당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그런 요청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냉담하게 반응했다. 볼턴-정의용-야치 쇼타로 국가안전보장국장 선에선 현상유지와 관련된 합의가 이뤄졌지만, 일본의 ‘윗선’(아마도 아베)이 거부한 것이었다. 그 결과 8월1일 오전 8시40분 타이 방콕에서 진행된 한-일 외교장관 회담 역시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예고대로 2일 각의 결정을 통해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하고 만다.
쏟아내는 말은 거칠었지만, 문재인 정부는 7월 하순 이후 타협적 자세로 돌아서 있었다.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이 8월2일과 23일 브리핑에서 밝힌 대로 “우리 정부 고위 인사(정의용 실장)의 파견이 7월 중 두차례 있었”고, 이 인사는 “8월15일에도 일본을 방문”했다.
그에 따라 문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매우 온건한 대일 메시지로 채워지게 된다. 문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고 제안한 뒤, 김기림의 시 ‘새나라 송(訟)’에서 따온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를 언급하며 “평화로 번영을 이루는 평화경제를 구축하고 통일로 광복을 완성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공개했다. 일본을 다독여 현재 위기를 벗어난 뒤, 장기적으로는 남북 간 평화경제를 구축해 일본이 함부로 흔들 수 없는 위대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에 대한 반응은 두 갈래에서 터져 나왔다. 북-미 대화의 장기 교착과 한-미 연합훈련에 잔뜩 독이 오른 북은 16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는 막말을 쏟아내며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보이는 발사체를 쏘아댔다.(북은 7~8월 총 7번 발사체를 쏘았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도 15일 방문지인 세르비아에서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기 위한 리더십을 대통령이 취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보인 타협적인 자세에도 일본의 입장은 1㎜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수모까지 당하면서, 무엇을 더 양보할 수 있을까.’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한겨레>에 “광복절 경축사에 그렇게까지 했는데 일본의 답이 없었다. 우리는 언제든 대화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6월 이전부터 노력했다. 두차례나 특사를 보냈고, 경축사 일부분을 미리 보내기까지 했다. 마지막까지 기다렸는데,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분노한 청와대는 비로소 진지하게 지소미아 연장 종료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16회에선 한국의 지소미아 연장 종료 결정을 다룹니다.
길윤형 | 통일외교팀장.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등을 썼고,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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