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줌쇼크 / 이원재

한겨레 2021. 1. 2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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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재택근무의 확산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가상회의 플랫폼 줌을 이용해 온라인 회의를 하고 있는 장면. 유튜브 갈무리

이원재 ㅣ LAB2050 대표

올해 미국 소비자가전박람회(CES)는 온라인으로 열렸다.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와 암논 샤슈아 모빌아이 대표 사이의 대화가 그중 한 세션이었다. 그들이 인공지능(AI)과 복지국가를 넘나들며 나누는 이야기도 유익했지만, 감쪽같이 한방에서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 같았는데 실은 각각 미국과 이스라엘에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어쩌면 코로나 시대를 상징하는 한 장면이었다.

비대면 문화가 우리 일상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Zoom) 회의와 재택근무는 일상이 됐다. 학생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화상수업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앞서가는 교수들은 온라인 수업으로 바꾸면서 아예 강의식 수업을 소그룹 토론 중심으로 바꾸었다. 독서토론모임까지도 화상으로 진행하는 곳들이 생긴다.

이렇게 형성된 비대면 문화는 코로나19가 지나가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효율성 때문이다. 이동할 필요도 인사치레를 할 필요도 없으니 시간도 절약된다. 회의에 꼭 필요한 사람들만 모여 꼭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많아진다.

비대면 만남은 시공간을 넘어선다. 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도 쉽사리 만날 수 있다. 급하면 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 예전에는 비어 있던 회의와 회의 사이도, 저녁 시간도 주말 시간도 종종 새로운 회의가 치고 들어온다.

이런 변화는 사회 운영 방식에 큰 충격을 줄 것이다.

무엇보다 지식 생태계에 폭발적 충격이 예고되고 있다. 줌과 유튜브는 전세계 지식 유통체계를 뒤흔드는 고속철도(KTX)망이다. 세계 최고의 강연과 토론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지식을 가진 사람은 폭발적인 수요를 누리며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식을 정리하고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엄청난 속도로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며 성장하고 있다.

국가들 사이 벽은 높아지지만, 어떤 의미에서 세계화는 더 확산된다. 지식 교류가 더 빨라지고 깊어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식의 중심부에서는 엄청나게 빨아들이고, 주변부에서는 빨려 들어가는 현상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자영업 구조에도 충격이 클 것이다. 영국의 민간정책연구소인 경제정책연구소(CEPR)는 최근 ‘줌쇼크’(Zoomshock)라는 보고서에서, 재택근무 확산으로 인해 런던 도심 상권의 극적 쇠퇴와 교외 주택가 상권의 활황을 예상했다. 실제로 지난해 런던의 인구는 30년 만에 줄었고, 부동산 시장도 출렁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방역 상황이 나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변화가 덜해 보이지만, 런던에서 벌어진 일들이 시차를 두고 서울에도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이미 ‘시내 중심가 목 좋은 곳 1층’이라는 자영업 노른자위 공식은 무너지고 있다. 온라인 거래가 오프라인 거래를 넘어서고, 동네 식당은 배달전문점으로 속속 변모하고 있다.

가장 큰 충격은 청년들처럼 아직 사회와 연결되지 않은 이들에게 올 것이다. 비대면 사회는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연결을 어렵게 만든다. 비대면 상황에서 새로운 연결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이미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다. 어디든 새로운 사람이 진입하기는 어려워진다. 비대면으로 지식은 얻을 수 있지만 관계를 얻기는 어려워서다.

이미 직업이 있고, 재산이 있고, 학벌이 있는 사람은 새로 연결되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다.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어쩌면 영영 극복할 수 없는 연결 격차를 대면하고 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소비자가전박람회 세션에서 현대 복지국가를 둘러싼 논쟁을 ‘벽과 천장과 바닥’이라는 세가지 차원으로 단순화해 설명했다. 다양한 정치세력이 국가 사이의 장벽을 얼마나 높일 것인지를 놓고 논쟁했고, 뛰어난 사람과 기업이 천장을 얼마나 뚫고 나갈 수 있게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했고, 실패자를 위해 바닥을 어느 정도까지 높여줄 것인지를 놓고 논쟁했다.

그런데 ‘줌쇼크’는 세가지 차원의 논쟁을 모두 날려 보내고 있다. 천장은 사라지고 있다.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한계를 모른 채 성장할 것 같다. 벽은 낮아지고 있다. 국경의 벽을 넘어 언제든 세계와 교류할 수 있다. 바닥은 꺼지고 만다. 뒤처진 사람들은 이런 기회에 접근하지 못한 채 보호장구 없이 맨바닥에 내던져진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쩌면, 이렇게 경계가 사라진 사회에서 천장을 뚫고 날아가는 사람들의 능력이 어떻게 바닥까지 닿게 만드느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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