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박하고 퉁퉁하니.. 어때요, 강부자 같은가요?"

정상혁 기자 2021. 1. 26.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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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장품]③ 배우 강부자와 조각상 '여행-폐허에서'

흔히 예술적 환희는 거기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 온다고 한다.

배우 강부자(80)씨가 18년 전 어느 날 서울 인사동의 한 화랑으로 달려간 이유도 이와 같다. “아침 신문에서 전시 소개 기사를 봤다. 웬 퉁퉁한 여인 조각상(像)이 도열한 사진이었다. 전율이 일었다. 마음 같아선 전부 사고 싶었다. 표정도 좋고, 순박하고, 퉁퉁하니 꼭 나 같았으니까.” 그날 그는 흙으로 빚은 ‘강부자’를 냉큼 구해 집으로 왔다.

지난 21일 배우 강부자씨가 서울 청담동 자택 현관 입구에 놓인 조각상‘여행-폐허에서’옆에 같은 자세로 섰다. “작가와는 일면식도 없고 전화 통화도 해본 적 없지만 작품에 한눈에 반했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강씨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 작품을 보게 된다. 도예가 한애규(68)씨의 여인상이다. “우리 집 대표작이니 현관 앞에 놨다. 오시는 분들께 ‘어서 오세요’ 강부자가 인사하듯이.” 조각상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내 나름대로 제목을 붙이면 ‘땅 보고 걷자’ 정도 되겠다. 겸손하자. 내 인생의 좌우명이다. 어릴 적엔 ‘담배 피우지 말자’ ‘입술 빨갛게 칠하지 말자’ ‘이혼하지 말자’ 다짐하고 살았다. 차츰 좌우명이 변했다. 그저 겸손하자. 흙처럼 자세를 낮추자.”

한애규는 모성(母性)의 전문가다. 1980년대부터 푸근하고 당당한 여인의 모습을 테라코타(Terra Cotta)로 빚어내고 있다. 흙으로 형상을 빚어 굽는 테라코타 방식을 통해, 흙의 질감과 곡면을 부각함으로써 특유의 따스함을 드러낸다. “전시작이 50점 정도 있었는데, 나는 이게 가장 좋았다.” 강부자가 고른 이 작품은 2003년작 ‘여행–폐허에서’ 연작. 강씨는 “흙을 빚듯 사람도 누구나 똑같이 태어난다”며 “운이 좋거나 나빠서 조금 달라질 수는 있으나 본질은 같다”고 말했다. 얼굴에 거의 화장을 하지 않는다는 강부자와 장식 없는 흙의 여인이 묘한 일치를 이룬다.

그의 집에는 권옥연·김종학·김창열·박생광·오치균·최영욱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이 즐비하다. 시간 빌 때마다 혼자 종로 일대 화랑가(街)를 거닌다. “맛있는 거 먹으러 지방 내려가거나, 주말에 화랑 구경 나가는 게 유일한 취미”라고 했다. “수십년 전부터 곗돈처럼 할부 부어가며 그림을 샀다. 가욋일로 돈이 들어오면 곧장 화랑으로 갔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공연으로 받은 개런티 50만원으로는 민경갑(1933~2018) 화백의 그림 ‘백목련’을 구했다. 남들 보석 살 때 나는 그림 샀다. 푼돈 조금씩 모았다가 액수에 맞는 작품을 사고, 돈 모자라면 ‘나중에 갖다 드릴게요’ 해가며 모았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으니까.”

도예가 한애규의 '여행' 연작. 둥글고 퉁퉁한 여인들이 제 각기 다른 표정을 지어보인다.

한번도 미술을 공부하거나 꿈꾼 적 없지만, 화랑가는 그에게 어떤 영감의 장소였다. 간혹 우연한 만남도 그곳에 있었다. 운보 김기창(1913~2001)과의 추억도 그중 하나다. “인사동에서 그림 구경하다 우연히 인사를 나눴다. 성북동 집에 초대하시기에 놀러가 필담(筆談)도 나누고…. 추석날 선생의 대표작 ‘세 악사’를 변주한 두 명의 악사(樂士) 그림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나는 그림을 배운 적 없지만, 그림을 보면 그 안에 한없는 이야기가 숨어있는 것 같다. 눈이 많은 것을 볼 수록 그 안에서 더욱 상상하고 즐기게 된다. 이를테면 한정희 화가가 그린 그림 ‘지중해의 장미’를 볼 때, 나는 지중해에서 장미를 보고 있는 것이다.”

올해 여든이 됐다. “대개 나이 먹는 걸 서러워하지만 나는 내 나이가 자랑스럽다. 그만큼 인생 공부 많이 했다는 얘기니까.” 25일에는 직접 녹음한 음원을 발매했다. 제목이 ‘더 나이 들면’이다. 가수 최백호가 선물한 곡이다. 가사에 ‘나이 더 들면 별수 없겠지, 하나 둘 버리고 사는 수밖에’라고 적혀 있다. 그것이 흙에 대한 은유처럼 들린다.

☞도예가 한애규는 누구?

서울대에서 도예를 전공한 뒤 프랑스 앙굴렘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80년대부터 일상 속 여성을 향한 긍정의 사유를 따스하고 포용적인 형상의 테라코타로 빚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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