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정연주는 안 된다

신동흔 문화부 차장 2021. 1. 2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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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與 KBS’ 만든 장본인, 방통심의위원장 유력
“종편에 족쇄 달 것” 밝혀… 비판 언론 입 막겠다는 뜻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공정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2004년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을 때, 지상파 3사가 쏟아낸 방송에 대해 한국언론학회가 대대적인 조사 연구를 실시한 뒤 내린 결론이다. 종편이 없던 시절, 지상파 화면은 국민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의사당 한가운데서 울부짖는 유시민·임종석 등 386 의원들 얼굴 모습이 연일 TV 전파를 탔고, KBS ‘대통령 탄핵-대한민국 어디로 가나’ 등 긴급 편성된 프로그램에서 탄핵 반대와 찬성 인터뷰 비율이 ’31대1′로 나가는 등 공정하지 못한 수준의 방송이 이어졌다.

정연주 전 KBS사장이 2012년 12월 11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중앙역앞에서 열린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후보의 거리유세에서 지원연설을 하고 있다./조인원 기자

총선을 한 달 남긴 시점에 쏟아진 지상파의 ‘물량 공세’ 이후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압승을 거뒀고, 노 대통령은 헌재의 기각 결정에 따라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현 여권이 최근까지도 그리워해 마지 않던 압도적 여대야소 상황이 만들어지기까지 지상파들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방송통신심의원회의 전신(前身) 격인 옛 방송위원회가 학술적 연구를 의뢰해 이런 기록이라도 남긴 것이 그나마 큰 성과였다.

굳이 옛날이야기를 꺼낸 까닭이 있다. 차기 방통심의위원장 후보로 거론되는 정연주씨 때문이다. 그는 당시 KBS 사장으로 불공정 탄핵 방송을 내보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노무현 정부의 ‘친여(親與) 방송’을 상징하는 인물이 문재인 정부에서 방송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심의하는 위원회 수장(首長)으로 온다니 한 편의 부조리극 같다. 그는 KBS에 긴 그림자를 남겼다. 당시 그가 발탁해 팀장·부장 등을 맡겼던 ‘정연주 키즈’ 상당수가 국장급 이상 주요 간부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재임 중이던 2006년 KBS는 주말 황금시간대에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차베스의 도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편성해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를 “신자유주의에 대항해 새로운 꿈을 꾸는 이들의 대안(代案)”이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베스 집권 이후 베네수엘라는 국민의 95%가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했고, 2019년의 물가상승률은 무려 1000만%에 달해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방통심의위는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방송통신위원회를 출범시키면서 방송위의 내용 심의 기능을 떼어내 별도 위원회에 맡기면서 탄생했다. 방송법상 지상파·종편·보도 채널의 공정성·객관성 위반 여부를 심의하는 유일한 조직이다. 방송의 공정성·객관성을 담보하는 최소한의 장치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실상은 심의 결과가 방송 평가에 반영되는 것을 이용해 일부 편파적 시민단체가 정부에 비판적인 방송사를 공격하는 공격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연간 1000건 넘는 방송 심의, 20만 건이 넘는 통신 심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과연 복잡한 사실관계를 제대로 따질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이 자리에 18년 전 ‘올드보이’가 온다는 소식에 벌써부터 “선거용”이라는 말이 파다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지 이미 밝혀 놓고 있다. 지난 4월 페이스북에 올린 ‘종편에 족쇄를 채우는 법’이란 글에서 “시민과 더불어 상시 감시 체제를 만들어 이를 바탕으로 방송통신심의위와 방통위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며 방통심의위에 집단 민원을 제기하는 법까지 상세하게 소개해놓고 있다. 대중을 동원해 현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의 입을 막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그는 2002년 대선 당시 한겨레 논설주간으로 “현역 3년 꼬박 때우면 빽 없는 어둠의 자식들, 면제자는 신의 아들” “병역 면제는 미국 국적 취득과 함께 특수 계급이 누려온 특권적 행태” 같은 글을 쓰면서 한나라당 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병풍’은 사기꾼 김대업이 누군가와 공모해 만들어낸 거짓말이었다. 이후 그가 KBS 사장에 임명된 뒤 정작 자신의 두 아들은 미국 국적자로 병역을 면제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자신에게 들이댄 잣대와 타인에게 대는 잣대가 달랐던 것이다. 지상파와 종편에 대한 잣대도 따로일 것이다. 이런 이중 잣대를 가진 인물이 방송 심의를 책임진다면, 이번에는 방통심의위가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공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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